엄태화 감독 "모든 걸 쏟아부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후회 없다" [D:인터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영화가 주는 서늘함과 지독한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랬다. 여름 성수기의 텐트폴로, 지금까지의 재난 블록버스터와 무엇이 크게 다를까 싶었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 상업 영화의 새 청사진을 제시했다. 한국의 부조리함과 집단이기주의를 현실적으로 그려냈지만 우아하고 세련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돼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김숭늉 작가의 인기 웹툰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을 각색했다.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1위로 시작해 3주 차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최근에는 제76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한국의 또 다른 이름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는 1980년대에는 한국이 급격한 도시화와 경제 발전을 이뤄낸 도시화 발전의 결과물이다. 경제 성장, 가족 구조의 변화, 사회적 계층 구분 등을 내포하고 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에 영향을 미쳤고, 이 영향은 2023년에도 현재 진행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더 비싼 아파트에 살길 희망하고 있다. 아파는 곧 신분이다.
"디스토피아인 한국을 배경으로 만들 때 어디가 가장 효과적일까 생각해 봤더니 아파트 이상으로 한국 사회를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가 없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아파트에서 자랐고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애환들이 아파트에 있잖아요. 이런 장르를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배경이었죠."
코로나19로 개봉이 미뤄지면서 엄태화 감독은 편집에 매진했다. 주연 배우 이병헌은 엄태화 감독을 두고 '편집실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어진 시간이 길어지자 여러 가지 방향으로 시도하면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최적화 톤을 찾아냈다.
"블라인드 시사를 두 번 한 후, 늘어지는 부분이 있으면 줄이고, 예측되는 장면은 잘라내는 등 편집을 계속 바꿨어요. 가장 중점을 둔 건 CG였어요. 현실적인 톤으로 초반부를 끌고 가는데, CG가 나올 때 리얼리티가 떨어져 판타지 같은 느낌이 나면 톤이 무너질 것 같았어요. CG를 최대한 리얼하게 보일 수 있도록 무지 애를 썼어요."
캐릭터 사이에 오가는 세밀한 감정선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악기 사운드와 귀에 익은 가요, 클래식이 한데 어우러진 음악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음악 감독과도 내내 붙어지내며 지금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아파트라는 주제 키워드를 가지고, 황궁 아파트를 대변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86년도에 지어진 아파트로 설정했는데 그 때가 한국 버블 시대였어요. 그런 영광의 시대를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같은 시기에 많이 쓰인 신디 사이저를 쓰고, 재난이 벌어진 이후에는 선사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주기 위해 뼈가 부딪치는 느낌의 타악기를 많이 썼죠. 또 조수미의 선생님이 부르신 '봄의 왈츠'가 등장하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조수님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2002년 월드컵을 봤고, 환희가 느껴지니 그런 유토피아적 기시감을 끌어오고자 많은 시도를 했어요."
아파트 외 폐허가 되며 "목사나 살인자나 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규칙들을 세운다. 주민들은 영탁(이병헌 분)의 지휘 아래 다시 작은 사회를 이뤄나가는데, 이 장면들은 마치 TV 속의 아파트 CF, 혹은 캠페인 영상을 연상케 한다. 다 무너진 곳에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주민들로 하여금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블랙코미디의 장을 연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초중반까지의 톤이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했어요. 전체적으로 다 리얼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조수미 선생님의 노래를 썼듯이 코믹적으로 보여주면 풍자가 될 거라 생각했어요. 유토피아로 착각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아파트 홍보 과정처럼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았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블록버스터의 뻔한 공식이었던 감정 과잉, 신파가 없다. 의도적으로 제거한 건 아니었다고 엄 감독은 설명했다.
"저에겐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무드가 깨지지 않는 게 중요했어요. 그 안에서 들어올 수 있는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다 보니 굳이 이런 공식이 필요한가 싶더라고요. 만약 공식대로 해서 흥행한다는 보장이 있다면 저도 썼을 텐데, 그렇지 않다면, 제가 생각하는 톤 안에서 완성도를 만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죠."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높은 완성도 중심에는 배우 이병헌이 있었다. 매번 다른 결의 연기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병헌은, 이번에도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회의 루저로 살다가 권력을 맛본 후 점점 변해가는 영탁을 서슬 퍼렇게 표현했다. 찰나의 순간에 바뀌는 눈빛은 도무지 영화에서 눈을 뗄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엄태화 감독은 이병헌이 캐스팅 되는 순간부터, 이 작품을 잘 만들 수 있겠다란 확신을 가졌다.
"영탁이 회상 신에서 영탁이 바둑알을 쓰는 장면은 저도 모니터를 보면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이병헌 씨도 모니터 후 '처음 보는 나의 얼굴이다'라고 말씀하셨고요. 30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하신 분인데도 새로운 얼굴이 나올 수 있구나 놀라웠고, 그만큼 시도하고 노력하는 배우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극 중반부 영탁이 주민들 앞에서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신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제2 막을 알린다.
"영탁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부터는 확 몰입해서 관객이 빠져나갈 틈이 없게 만들고 싶었어요. 중반까지는 풍자적으로 갔다면 그 때부터는 스릴러로 톤으로 전환되죠. 에너지가 응축된 게 터지면서 후반부로 흘러가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장르적인 음악을 사용했었죠."
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영탁에게 반기를 들고, 양심적인 인물 명화를 두고 관객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엄 감독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제시하고 상징하는 인물은 명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 무얼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그 문제를 명화란 인물이 상징하고 있고요. 명화 캐릭터가 중요한 이유는 질문을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에요.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누군가는 질문이나 방법을 찾을 시도 자체를 안 하잖아요. 이 영화가 가진 엔딩도 명화처럼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끝났으면 했어요. 그게 희망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반상회 신이다.
"그렇게 많은 배우들과 한 번에 작업 해본 적이 없어서 불안했어요. 배우 세 명만 있어도 한 명이 연기를 바꾸면 두 사람의 리액션이 바뀌기 때문에, 그 때 질문에 저에게 오거든요. 그래서 서른 여섯 명이 나오는 장면에서 서른 여섯 명의 배우가 저에게 다 질문하면 어쩌지란 걱정이 앞섰죠. 그래서 배우들이 질문하기 전에 질문거리를 없애야겠다 싶어서 고층인지 저층인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재난 전에는 어떤 직업이었는지, 이 아파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 디테일한 설정을 줬어요. 첫 촬영이 끝난 후에는 다 각 배우들에게 전화해 어떻게 연기하는지 편한지 오래 통화했어요. 그걸 기반으로 또 본인들이 해석한 걸 만들어오더라고요. 다음 날 촬영장에 갔는데 이들이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신나게 그 장면을 찍었거든요.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에요."
영화에는 반가운 배우가 등장한다. 엄태화 감독의 동생 엄태구다. 엄태구는 황궁 아파트 밖에 살아남은 생존자로 분해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한 연기를 선보이며 짧은 등장만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엄태구는 '잉투기', '가려진 시간'에 이어 친형인 엄태화 감독의 작품에 또 다시 얼굴을 비쳤다.
"처음부터 그 역할에 동생을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존재감이 있는 배우가 나와서 확 집중도를 높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동생의 목소리가 한 몫 했어요. 그걸 관객이 귀담아 들었으면 했거든요. 그래서 제안을 드렸고 감사히 해주더라고요.(웃음) 동생이 배우니 든든해요. 배우로서 작품 할 때 어려운 점들을 많이 이야기해 주니, 제가 다른 배우를 대할 때 도움이 돼요."
영화의 크레딧은 박지후가 부른 '아파트'와 함께 흐른다. 영탁이 절망과 슬픔, 분노, 야욕 등 복합적인 감정을 응축해서 부른 '아파트'와는 다른, 박지후의 목소리가 입혀져 쓸쓸한 분위기로 편곡됐다.
"엔딩을 허무하고 쓸쓸한 느낌의 곡을 쓰고 싶었어요. 명화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그 장면을 볼 때 음악이 너무 힘이 떨어지면 안될 것 같아 스케일 있는 오케스트라로 곡으로 끝내고 싶었죠. 그 곡이 끝나는 시점에 원래 하고자 했던 정서의 음악이 나오면 좋겠다 싶었고 영탁이 부른 '아파트'가 떠올랐죠. '아파트'를 누군가 쓸쓸한 느낌으로 다시 부르면 좋을 것 같았고 혜원이 떠올랐어요. 혜원의 목소리로 그 곡을 다시 들었을 때 같은 곡이지만 다른 뉘앙스로 느껴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는 쿠키 음악까지 듣는 게 쿠키 제대로 즐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절망을 보기도 하고 희망을 갖기도 한다. 엄태화 감독은 창작자로서 관객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웃어 보였다.
"유토피아는 없는 세상이잖아요. 답을 내리기 힘들어요. 저는 이 영화가 던진 질문 정도의 입장이에요. 이입할 수 있는 인물들을 따라가면 각자 느끼는 해석과 엔딩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 정도의 질문은 던지고 살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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