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전력은 은폐가 일상" 일본인들의 경고

하성태 2023. 8. 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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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의 사이드뷰] 방송을 통해 본 <더 데이스> , 진실과 은폐 사이

[하성태 기자]

"비엔나에서의 증언은 위증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을 숨긴 이들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명령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KGB와 당 중앙위원회로부터요. 현재 동일한 결함을 지닌 원자로가 16개나 있습니다. 그 중 셋은 지금도 가동 중입니다. 여기 체르노빌에서 20km도 안 되는 곳에서요."

HBO 드라마 <체르노빌> 5화의 클라이맥스. 소비에트연방 과학기구 소속 핵물리학자이자 체르노빌 원전사고 조사위원이었던 레가소프 교수는 "당신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경고에도 위와 같은 사자후를 토해 내며 진실을 알린다. 그에 앞서, 1986년 8월 IAEA가 주관한 특별회담에 참석한 그는 소련 정부의 책임보다 원전 관련자들의 과실을 지적하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사실이 아니었다. 아니, 당시 체르노빌 원전 참사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소련 정부와 KBG 비밀 경찰의 압박과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체르노빌 원전 참사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녹음테이프와 조사 자료를 남겨 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련의 관료주의와 과학을 부정하는 반지성주의를 막지 못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뒤엉킨 선택이었다.

실존 인물인 레가소프 교수의 목숨 바친 헌신에도 소련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기에 바빴다. 1986년 4월 발생한 체르노빌 참사에 대한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사고 관련 사망자는 원자력 발전소 관계자 2명, 소방관 29명 등 총 31명이 전부였다. 체르노빌에 사람이 다시 거주하려면 3천 년이 흘러야 가능한 대참사인데 관련 사망자 숫자는 터무니없다. 사실의 은폐와 축소가 공공연히 자행됐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숫자다.

후쿠시마 원전 참사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일본드라마 <더 데이스>를 보면, 참사 당시 콘트롤타워였던 간 나오토 일본 전 총리나 도쿄전력 간부들 모두 체르노빌 참사의 결과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려 봤던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원전 참사 역시 1호기 전체가 폭발했다면 일본의 운명을 가를 대참사로 번질 가능성이 대두됐었다.

<더 데이스>는 참사 2년 만에 암으로 숨진 요시다 마사오 도쿄전력 제1원자력 발전소 소장이 남긴 저서 <요시다 조서> 및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보고서>, 그리고 참사 관련자 90명의 이야기를 담은 <죽음의 문턱을 본 남자> 등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 당사자들을 포함해 현장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이 실화 드라마 속 메인 빌런(악당)이 그러니까 도쿄 전력 수뇌부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더 데이스> 속 메인 빌런  
 
 넷플릭스 시리즈 <더 데이스>.
ⓒ 넷플릭스
 
드라마 속 일본 총리나 원전 관계자가 서슴없이 '우리도 체르노빌처럼 되는 것 아니냐'라거나 도쿄전력(토오전력)을 대놓고 불신하는 대사들이 나올 정도다. <더 데이스>는 이처럼 자칫했으면 후쿠시마 참사가 체르노빌의 10배에 달하는 피해가 낳을지 몰랐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드라마 속 토오전력은 원전이 폭발하는 상황에서도 진상 파악과 대처에 있어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본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브리핑에서도 거짓말이나 축소된 사실을 늘어놓기 일쑤다. 오죽했으면 드라마 속 일본 총리가 "토오전력(도쿄전력)은 부정확한 정보만 내놓고 있어. 1호기 수소 폭발이 TV로 생중계되는데도 1시간이나 지나 정부에 보고했지"라며 짜증 섞인 호통을 치고 있었을까.

3호기 폭발로 인해 후쿠시마 참사는 국제 원전 참사 중 체르노빌만이 도달했던 위험 수준 레벨7로 격상된다. 드라마 속 총리 보좌진을 분노케한 토오전력은 도쿄까지 정정될 시 의료 기기에 목숨을 의탁한 응급 및 중증 환자들의 생명을 뒤로한 채 대기업 고객들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어이없는 기업 이기주의를 용감하게 실천한다.

"토오전력(도쿄전력) 말만 믿으라고? 혹시라도 정말 사람이 죽게 되면 토오전력은 살인죄야. 미필적 고의라고. 그런데도 대형 고객이 더 중요해?" (드라마 속 정부 관계자)

지난 24일 일본 정부와 그 토오 전력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상 방류를 실시했다. 도쿄 전력은 앵무새처럼 안전 또 안전을 강조 중이다. 27일엔 오염수 해상 방류 이후 최초로 방출설비 등을 공개하며 "안전 확보" 및 "안전 점검 이상 무"를 강조했다. 향후 30년 간 문제없이, 계획대로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는 도쿄전력에 대한 불신은 이미 커질대로 커졌고, 방류가 시작된 지금도 여전하다.

이런 불신을 경고한 현재형의 목소리는 <더 데이스> 외에도 많았다. 방류를 한달 여 앞뒀던 지난 7월 7일 방송한 KBS <추적60분> 제작진은 전 도쿄전력 직원들의 인터뷰를 방송했다. <더 데이스> 속 목숨을 내놓고 원전 피해 복구에 투입됐던 이름 모를 주인공들의 동료가 바로 이들일 것이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도쿄 전력은 은폐가 일상"이라는 취지의 비판과 경고를 쏟아냈었다.

"쓰나미가 덮친 후, 디젤 발전기도 멈춰버리고 배터리도 사용하지 못해 (원전이) 거의 전기가 없는 상태라는 것은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원자로가 녹은 것 아닌가' 쉽게 유추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을 도쿄전력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해 말해, 은폐한 거죠." - 하스이케 토오루, 전 도쿄전력 직원, 과거 후쿠시마 제1원전 근무

도쿄전력 전 직원들이 한국 공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몸담았던 회사의 "사실 은폐" 습관을 털어 놓는 일은 분명 흔치 않은 광경일 터다. 심지어, 후쿠시마 제1원전 설계에 참여했다는 다른 도쿄전력 전 직원은 도쿄전력에게 은폐는 '특기'라며 씁쓸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도쿄 전력이) 문제를 숨기는 건 일상다반사입니다. 예를 들어 핵연료봉을 교체할 때, 크레인으로 옮기다 떨어져서 부서졌다거나 그런 일도 꽤 많았는데 그런 건 전부 숨겼습니다. 원전 사고 이후에 떨어뜨려서 부서진 핵연료봉이 몇 개 있는 게 들통 났습니다. 은폐는 도쿄 전력에게 어떤 의미냐 하면... 뭐랄까, 특기랄까." (기무라 도시오, 도쿄전력 전 직원).

일본 내 도쿄전력을 불신하는 목소리
 
  24일 오후 1시 30분께 오염수(일본 정부 명칭 '처리수') 해양 방류를 시작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모습.
ⓒ 교도통신=연합뉴스
 
<더 데이스>는 웃지 못 할, 아니 웃긴데 슬픈 장면이 하나 포함돼 있다. 참사 발생 직후, 정부 대책위원회에 불려온 원전 전문가가 제대로 된 예측과 대답을 하나도 내놓지 못한다. 그러자 일본 총리는 "당신, 어느 학교 나왔느냐"고 호통을 치듯 묻는다. 돌아오는 답은 도쿄대학교 경제학부다. 일본은 우리로 치면 원전마피아라 할 수 있는 세력을 '원자력촌'이라 부른다. <더 데이스>는 그 '원자력촌'이 점령한 도쿄전력 수뇌부의 무능함을 대놓고 질책한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예전에 도쿄전력의 사장은 도쿄대 법학부나 경제학부가 아니면 되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인 시각이 상당히 강해질 수밖에 없죠. 원전 관련 직원 중에 원자려 전문가는 10~20% 밖에 안 됩니다. 원자력 전문가 시각에서 '이건 위험하다'해도 좀처럼 (경영진과) 합의점을 못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추적 60분>과 인터뷰했던 고사코 도시소 도쿄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그는 후쿠시마 참사 당시 정부 관방 부문에 참여한 인물이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구태여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강행한 것도 막대한 비용 문제가 결부돼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아울러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이런 도쿄전력 비판 주장이 우리 방송이나 언론에 소개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2년 전 MBC <PD수첩>과 인터뷰한 일본 원자력시민위원회 츠츠이 테츠로 위원 역시 삼중수소 배출 자체가 문제라며 "저희는 삼중수수도 바다에 배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외의 핵종도 들키지 않았으면 그대로 바라로 흘러나갈 뻔 했습니다"라며 "이처럼 도쿄전력 주장은 앞뒤가 다르다는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꼬집은 바 있다.

이런 일본 내 양심 있는 목소리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더 데이스> 속 일본 총리의 실제 인물인 간 나오토 일본 전 총리다. 후쿠시마 원전 참사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반핵 반원전 인사가 된 간 전 총리는 지난 2021년 2월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했을 당시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전에 설치된 지진계의 고장을 포함해 피해 상황을 다시 은폐했다는 의혹에 휩싸이자 이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3월 KBS 등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다수 진행하며 이런 취지의 발언을 연이어 쏟아내기도 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인재'(人災)였다. 안타깝지만 지난 10년간 도쿄전력의 체질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최근 지진으로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결국 누구를 믿고 누구를 불신하느냐의 문제가 한 사회의, 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곤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시작된 지난 24일,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한 일본 시민은 도쿄전력 앞에서 이런 구호를 외쳤다. 마치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내는 우리 정부를 향한 일침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방사능으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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