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시각각]6.25 전범(戰犯)만을 단죄하라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건 위험하다. 굴곡진 역사를 헤쳐 온 대한민국은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았다고, 일본 관청에서 일했다고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낙인찍으며 ‘파묘’(破墓ㆍ무덤을 파냄) 운운하는 건 폭력이다. 반대로 그 시대 유행처럼 번진 공산ㆍ사회주의를 추종했다고 반역자인 양 몰아세우는 것 역시 매카시즘이다. 근ㆍ현대사일수록 입체적이고 균형적이며 섬세한 접근이 필수다.
그런 면에서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흉상 이전은 섣부르다.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고 하는데, 그가 봉오동ㆍ청산리 전투(1920년) 이후 소련으로 들어가 볼셰비키 당원(1927년)이 된 건 사실이다. 자유시 참변(1921년)에 대한 책임도 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공산체제이면서도 소수민족의 독립을 지원했다. 나라 잃은 시기, ‘적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소련에 의탁한 것을 무조건 비판할 수 있을까.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와 싸웠던 윈스턴 처칠은 “만약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하원에서 악마를 위한 지지 연설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해방 2년 전인 1943년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일성 정권 수립이나 6ㆍ25 전쟁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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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쟁 지휘한 홍범도는 예우
중공군에 복무한 정율성은 거부
이념보다 구체적 행적이 잣대돼야
」
반면에 정율성(鄭律成ㆍ1914~1976)은 전혀 다른 케이스다.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역사공원’(878㎡)을 짓겠다는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가 겸 음악가로 활동하다 중국인으로 생을 마감한 시대의 아픔”이라고 했다. 비열한 은폐다. 광주 태생인 그가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포함된 결정적 이유는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해서다. 특히 팔로군행진곡은 1950년 11월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6ㆍ25 전쟁에서 국군ㆍ유엔군은 77만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정율성은 해방 이후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협주단장 등으로 활동했고, 1949년엔 북한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도 작곡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중공군의 일원으로 전쟁터에 직접 뛰어들었다. ‘백운산을 노래하자’ ‘영예로운 지원군’ 같은 군가를 만들어 중공군 사기 진작에 앞장섰고, 1ㆍ4 후퇴 때는 서울에 머물며 ‘조선궁정악보’ 등 조선 왕실 유물을 중국에 가져갔다. 이런 행적이면 6ㆍ25남침의 단순 부역자가 아니다. 주동자이자 적극 가담자였다. 그런 자를 위한 역사공원이라니, 대한민국에 총구를 겨눈 침략자를 기리겠다는 것인가.
이미 광주엔 정율성로(路)가 있고, 정율성 동요제도 열리고 있다. 이런 일이 최근 벌어질 수 있었던 건 사대주의에 가까운 ‘친중 모드’도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론 6ㆍ25의 책임 소재를 흐릿하게 한 탓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올해 6월 25일에 『1950 미중전쟁』이란 책을 SNS에 소개하며 “한국전쟁은 국제전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중공의 참전 논리인 항미원조(抗美援朝ㆍ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처럼 6ㆍ25를 촉발한 김일성ㆍ스탈린의 도발 책임을 교묘히 희석한 것이다. 2019년 현충일에도 문 전 대통령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국군의 뿌리”라고 했다. 김원봉이 김일성 정권에서 국가검열상ㆍ노동상 등 요직을 맡았고, 6ㆍ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훈장을 받았다는 건 철저히 모른척했다.
기준은 명확해야 한다. 정율성ㆍ홍범도 논란을 이념 전쟁으로 몰고 가는 건 난센스다. 정율성을 부정하는 건 그가 공산주의자이어서가 아니다. 6ㆍ25 전쟁 범죄자, 즉 전범(戰犯)이어서다. 홍범도 장군을 예우하는 건 그가 공산주의자였음에도 항일무장투쟁 최선두에 섰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는 헌법적 가치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아닌가. 반대편이라고 가차 없이 숙청하는 건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이 저지르는 짓이다.
최민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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