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한국의 독립 첫 선언…일본이 점령한 동남아는 왜 빠졌나

2023. 8. 2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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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선언 80주년을 맞으며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올해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화두는 정전협정 70주년, 한미동맹 70주년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계속되고,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시점에서 1953년에 있었던 정전협정과 한미상호조약은 그 현재적 의미가 절대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다. 80년 전인 1943년 12월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이다.

「 루스벨트·처칠·장제스, 군국주의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 합의
한국의 ‘노예 상태’ 적시 주목, 신탁통치 논란의 씨앗 되기도
동남아 등의 독립 구체적 언급 없어…다시 유럽 영향권으로
영원한 원칙은 허구…이해관계로 움직이는 국제질서 직시해야

‘적절한 과정’ 통해 독립이 남긴 것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을 주도한 지도자들. 왼쪽부터 중국 장제스 총통,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 [중앙포토]

카이로 선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만나서 군국주의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의 원칙을 결정한 선언이었다. 카이로 회의는 얄타회담·포츠담회담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루어진 한국과 관련된 3대 전중(戰中) 회담의 하나로 중·고교 국사 문제의 하나로 자주 출제됐었다.

카이로 선언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됐다. 하나는 열강들이 한국에 대한 독립을 선언한 첫 번째 선언이었으며,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둘째로 한국을 독립시키되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서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신탁통치 논쟁을 불러일으킨 기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식민지 한국 상황 열강에 전달

어느샌가 카이로 선언을 비롯한 전중회담은 잊힌 역사가 되었다. 냉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얄타회담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재확인하고 전후 영토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와 전범재판을 규정했던 포츠담 선언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눈팔 새 없이 변해가는 국제질서 속에서 카이로 선언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카이로 선언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 중의 하나는 한국을 독립시켜야 하는 이유를 적시했다는 점이다. ‘노예 상태에 유의(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한다는 대목이다. 3·1운동을 비롯해 끊임없이 진행된 한국의 독립운동은 식민지 한국의 상황을 열강들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주장을 일축했다. 일본은 1943년 대동아회의를 개최했다. 주로 일본 점령 국가들(필리핀·베트남·미얀마·만주)의 괴뢰정부 수뇌들을 초청했다. 일본이 점령하고 싶었던 인도 괴뢰 망명정부 지도자도 초청했다. 일본은 유럽과 미국 등 서양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아시아적 발전, 그리고 아시아인의 자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아공영권의 허상 확인

한국의 독립을 처음 적시한 카이로 선언 문건. [중앙포토]

한국과 타이완은 아예 초청받지 못했다. 괴뢰정부 대신 일본총독부가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원자재 공급기지로서 동남아 점령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미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았던 미얀마와 필리핀에는 ‘당근’ 정책으로 멀지 않은 시기에 독립을 약속했던 반면, 한국과 타이완에 대해서는 독립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자 중립국을 통해 두 가지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 정전 또는 종전을 하는 조건으로 덴노 시스템의 유지, 그리고 조선과 타이완의 식민지 유지를 제시했다. 조선과 타이완을 영구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군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이로와 포츠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던 연합국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에 대한 영구적 식민지 정책은 아시아인의 자립을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이 얼마나 허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허상은 이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연결되었기에, ‘노예상태’라는 언급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연합군 서유럽에 대한 배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과 타이완, 그리고 만주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단지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및 일본의 탐욕에 의해 점령된 지역이라고 통칭했다. 여기에는 1차 대전 패전국 독일로부터 일본이 넘겨받은 중국의 일부 지역과 북마리아나 제도, 그리고 1937년 제2차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 지역들이 포함된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속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만주 침략 이후 국제연맹으로부터 탈퇴한 일본은 진주만 습격 직후 미국의 경제봉쇄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산유지역에 진출했다. 이 지역은 고무가 생산되는 말레이시아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생명줄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연합국이었던 서유럽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연합국 핵심이었던 영국은 모두 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2차대전을 통해 일본에 의해 인도를 제외한 식민지 지역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일본이 패망한다면, 이 지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독립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과거 유럽 제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는 서로 다른 8월 15일을 맞이해야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귀환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 자리에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다시 복귀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에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었지만,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는 또 다른 제국을 향한 독립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독일의 점령으로 큰 피해를 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는 재건이 필요했다. 이들은 식민지를 재건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세력들에게는 황당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카이로 선언에 포함되었던 타이완도 당황했다. 일본 점령자들에 반대했던 타이완 원주민들에게는 청이 나가자 일본이 들어왔고, 일본이 나가자 국민당이 들어왔다. 청과 국민당 공권력을 비교하다 보니 일본이 더 나았다고 판단하게 된 타이완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되기도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불안한 요소가 있었다. 독립을 약속해준 것은 감사했지만 ‘적절한 과정’이 문제였다. 1945년 이전 위임통치를 했던 지역들이 적지 않았다. 패전국의 식민지는 제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독립한 지역도 있었고, 다시 위임통치 지역으로 들어간 지역도 있었다.

독일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일본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남태평양 지역, 오토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리되거나 그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모습은 독립운동가들이 원했던 미래가 아니었다. 이들은 미래가 불확실한 위임통치나 신탁통치에 민족의 장래를 의지할 수 없었다.

철저하지 못했던 일본 전범 처벌

결과적으로 본다면 일본 패망 이후의 처리 과정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내용대로 진행되었다.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과 식민지로부터 일본의 공권력이 철수했고, 연합국에 항복했다. 한반도 분할점령을 규정했던 일반명령 1호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항복을 받기 위한 과정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쿄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뉘른베르크 재판이 그랬듯이 철저한 전범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전쟁에 동조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기회라도 부여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비참한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카이로와 포츠담 정신의 굴절

물론 일본에 대한 민주화 개혁과 전쟁을 재개할 수 없도록 하는 산업구조 재편, 재무장 금지 등의 정책이 초기에 실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도래하면서 일본과 독일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부활시키는 정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국이었던 한국과 중국이 참여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독일은 냉전으로 인해 평화조약도 맺지 못했다.

냉전과 탈냉전을 거쳤지만, 동아시아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냉전 하에서 혁명과 열전을 경험했기에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내용과 체제가 그대로 계승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정신은 지금도 계속돼야 한다. 카이로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동거하고 있다고 할까.

강대국들이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우선시했던 상황이 카이로 선언을 만들어냈다면, 냉전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배경이 되었다. 탈냉전 시대를 지나 21세기 동아시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카이로 선언은 모든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한다는 국제정치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교훈으로 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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