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할아버지의 틀니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33년이 넘었다. 요즘 재건축 논의가 진행되어 공원 산책길에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3년 전 우연히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나는 동네가 마음에 들어 이사를 결정했다. 울창한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렸고. 사람도 건물도 함께 풍화되는 것 같았다. 나의 이웃은 노인들이었다. 층간소음은 먼 나라 이야기여서 나는 평화로웠다. 너무 조용해서 문득 불안해지면 나는 김치전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공원 벤치에 앉아 처음 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 어릴 적 친구인 동네 할아버지
이끼 낀 담장에 어린 아름다움
오직 젊음을 강요하는 현대인
풍화는 소멸 아닌 시간의 완성
」
생각하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노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잦은 이사로 동네에 친구가 없었다. 낮이면 어른들은 일하러 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눈을 뜨면 윗목에 밥상만 놓여 있었다. 이사한 집은 퇴락한 한옥이었는데 나는 탐험하듯 집 안팎을 돌아다녔다. 뒤뜰의 툇마루에서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는 둥근 양은 밥상에서 방금 식사를 끝냈는지 틀니를 빼서 그릇에 헹궜다. 여섯 살의 나는 입에서 뛰쳐나온 이빨에 너무 놀라 까무러칠 것 같았다. 틀니를 다시 입에 넣는 모습이 마술 같았다. 싱긋 웃는 그의 이가 가지런했다.
나는 매일 눈을 뜨면 뒤뜰의 그를 찾아갔다. 그는 곁을 맴도는 어린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바둑판만 들여다보았다. 나는 관심을 내게 돌리려 바둑판에 손가락을 살짝 얹어 톡톡 두드렸다. “저리 가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퉁명스럽지는 않았다. 그의 입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는 바둑이 심심해지면 가끔 내게 틀니 탈출 묘기를 보여주었다. 틀니가 빠지면서 홀쭉해지는 볼과 동굴 같은 입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자주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틀니를 건네주었다면 깨끗하게 씻어서 그의 입에 정성껏 끼워줄 수도 있었다. 친구도 가족도 그의 곁에 오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우리 둘뿐이었다. 그에게 오목을 배웠는데 내가 지면 틀니를 뺀 그가 가끔 헐헐 웃었다. 그 집을 떠난 후에도 가끔 그의 틀니를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덜컹거리던 그의 틀니를 고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파트로 이사 온 후 나는 오래된 틀니처럼 덜컹거리는 집안의 소모품을 수선했다.
싱크대 수전이나 천장 등을 교체하는 것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했다. 내가 볼 때 시간은 인간과 건물 모두에게 공평했다. 노화와 풍화에서 유지 보수하는 일은 손이 많이 간다. 시간이 주는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오래된 건축물을 만날 때도 나는 곧잘 감동한다. 이끼 낀 담장, 세월이 묻은 붉은 벽돌, 오랜 손길로 윤이 나는 마루, 자연의 감가상각이 건축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경우다.
사람도 그렇다. 세상이 준 수많은 상처를 인간을 이해하는 단초로 쓰는 이를 보면 콧등이 시큰해진다. 환경과 경험이 존재를 규정함에도 상황을 초월하는 인간은 경이의 대상이다. 쇠락이 완성의 과정이 되는 존재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구한 세월을 견뎌 온 건축물에서도 나는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의 시간은 소멸의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완성의 과정으로 보인다.
콘크리트의 수명은 100년을 보고 수퍼 콘크리트는 200년을 장담한다. 그러나 현대는 더 많은 이익을 위해 건물을 파괴한다. 젊음을 권하는 사회가 성형과 보톡스를 강요하듯 미학이 가치를 앞서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 전 치과에서 어금니 두 개를 발치했는데 의사가 임플란트를 권유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틀니가 떠올라 의치가 덜컹거리는 이유를 물었다. “안 맞아서 그렇죠. 잇몸이 주저앉았거나.” 의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건물이나 사람이나 노화는 관심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는 여섯 살의 외로움을 놀아준 넉넉한 사람이었다. 입에서 뛰쳐나와 기이하기 짝이 없던 ‘틀니 탈출 묘기’는 어린 날의 슬픔을 잊게 했다. 그는 내게 입을 벌려 동굴 같은 입속을 보여주었고, 오목을 가르쳐주었고, 박하사탕도 가끔 주었다. 나는 덜컹거리던 틀니가 그리운지 그가 그리운지 조금 헛갈렸다.
내게 만약 손자가 생긴다면 틀니 묘기를 부려볼까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치과 의사에게 임플란트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6개월 후면 잇몸이 단단해지니 그때 식립해도 된다고 설명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아파트 벽면에 재건축 플래카드가 붙었다고 했더니 앞으로 15년은 걱정하지 말고 잘 살라고 했다. 현대가 미학이 가치를 우선하는 시대라지만 ‘건축의 역사’는 세월과 환경으로부터 건물을 지키려는 투쟁이었다. 저항이 만만치 않을 거라며 말을 이었다. “원주민이 거의 노인이잖아?” 낯선 동네 아무도 없던 어린아이에게 덜컹거리던 노인의 틀니는 정다운 기억이었다. 어떤 기억은 소멸이 아니라 완성으로 남는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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