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없는 빌딩이 없다” 부동산 금융 초비상
“개인에게 위험 전가” 모럴 해저드 만연
고금리가 길어지고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금융권에서는 다수 투자자에게 셀다운된 국내외 부동산 부실 우려가 확산 중이다. 저금리의 막바지였던 2017~2019년 사이 여러 투자자에게 셀다운됐던 부동산 자산은 투자 만기가 속속 돌아오면서 줄줄이 손실 위기를 맞았다. 부동산 금융 부실 경고등이 본격화한 최근에는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셀다운이 차질을 빚자 개인 투자자에게 이를 밀어내려는 움직임이 목격된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평가받던 서울 핵심 상권 사업장에서는 개인 투자자에게도 판매된 수백억원대 ‘브리지론(Bridge Loan)’의 디폴트 사례가 나와 금융사와 투자자 간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처럼 거시경제 방향성을 일률적으로 진단하기 모호한 상황에서는, 금융사가 떠안았어야 할 잠재 부실이 ‘셀다운’을 통해 금융 시스템 곳곳에 퍼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모럴 해저드의 단면으로 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해외: 부실 전염 확산
미래에셋 주도 홍콩 빌딩 입방아
국내외 부동산 자산 부실이 빠른 속도로 전염되고 있다. 특히 대체투자업계에서는 해외 부동산과 관련 “문제없는 빌딩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2019년 미래에셋증권이 주도했던 홍콩 랜드마크 오피스 빌딩 투자 실패 사례가 입방아에 올랐다. 2019년 홍콩 골딘파이낸셜글로벌센터빌딩 대출펀드를 판매했던 미래에셋그룹 계열사 멀티에셋자산운용은 최근 해당 펀드를 90% 상각 처리하기로 했다.
미래에셋은 자체 투자금 300억원을 제외한 2500억원을 셀다운해 대출금을 마련했다. 국내 증권사와 보험사, 연기금 등 기관 투자와 개인 ‘큰손’도 우리은행과 미래에셋증권 등 리테일 창구를 통해 펀드에 가입했다. 당시 보증을 선 홍콩 억만장자가 파산하고 고금리 상황에서 빌딩 가격이 급락하면서 펀드 자산의 거의 대부분이 상각될 것으로 보인다. 연 5% 수익을 보고 투자에 나섰던 국내 금융사와 거액 자산가는 90% 안팎의 손실을 볼 처지에 놓였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펀드가 보유한 중순위 채권의 원리금 회수가 최우선 과제”라며 “법적 절차 등을 통해 투자자 보호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오피스 빌딩에 투자한 펀드도 손실 위기에 놓였다. 이지스자산운용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의 트리아논빌딩에 투자한 펀드다. 트리아논빌딩의 주요 임차인이던 은행 ‘데카뱅크’가 임대차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서 수익성에 경고등이 켜졌다. 임대 가능 면적의 약 60%를 차지하는 데카뱅크는 2024년 6월 계약이 만료된다.
이 펀드는 2018년 출시 당시 기대배당수익률이 연 6~7%로 화제를 모았다. 펀드 규모는 약 3700억원으로 이지스자산운용은 금융주관사와 함께 공모펀드(1868억원)와 사모펀드(1835억원)로 셀다운해 자금을 모았다. 사모펀드의 주요 투자자는 하나증권과 키움증권 등이다. 공모펀드는 KB국민은행·대신증권·한국투자증권 등을 통해 개인 투자자에게 팔렸다. 이지스자산운용은 현지 자문사를 선정하고 해당 건물 매각 등 펀드 수익성 추가 악화를 막기 위한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시장에서는 원활한 매각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국내 금융사가 셀다운 목적으로 투자한 해외 부동산이 홍콩, 미국, 영국, 벨기에 등 세계 전역에서 손실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투자사들이 매입한 유럽 부동산은 90여개에 달한다. 한국신용평가는 “하반기 증권사들의 우발 부채와 해외 대체투자 부실 위험에 따라 신용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만기 연장 과정서 갈등 노출
국내 부동산 금융 대출채권을 셀다운한 상품에서도 잠재 부실이 속속 현실화하고 있다. 특히 최근 금융권에서 적극적으로 부동산 자산을 셀다운하는 과정에서 손실 방어 능력이 취약한 개인 투자자에게로 관련 부실이 옮겨 가는 양상도 목격된다. 무엇보다 최근 금융당국이 부동산 금융 부실 가능성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잇달아 내면서 대체투자업계에서는 ‘셀다운 물량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급박한 분위기 속에서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셀다운은 어지간한 우량 거래가 아니고는 매각이 이뤄지기 힘들다는 게 대체투자업계 진단이다. 익명을 원한 대체투자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금리가 워낙 올라 셀다운 물량의 수익성 자체가 기관 눈높이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미매각 물량은 리테일 창구를 통해서라도 서둘러 털어내자는 것이 작금의 분위기”라고 털어놨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한 사례가 최근 불거졌다. 대체투자업계와 키움증권에 따르면,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업무·상업시설 건축 사업을 위해 키움증권을 금융주관사로 끼고 개발 PM을 맡은 스타로드자산운용 등이 참여한 브리지론이 디폴트 처리됐다. 해당 개발 건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24-3, 124-4(2개 필지)로 지하 4층~지상 4층에 걸쳐 업무시설 4개층, 근린생활시설 3개층을 건축할 예정이었다. 브리지론은 선순위 427억원, 중순위 70억원, 후순위 15억원 등으로 총 512억원 규모다.
시행사가 브리지론 조달을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스타로드이태원SPC)에 원리금을 상환하면 이 SPC는 3개 트렌치의 대출채권 투자자에게 약속한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는 일반적인 구조다. 1차 만기였던 올 5월 말까지 본PF가 집행되지 않자 2개월 만기 연장 과정에서 투자자 사이 잡음이 불거졌고 결국 7월 말로 디폴트 처리됐다. 고금리 상황에서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데다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로 개발이익 불확실성이 커지자 1군 건설사 대부분이 책임 준공을 외면한 것으로 알려진다.
부동산 PF의 골자는 시행사가 땅을 사고(브리지론) 시공사가 건물을 지어(본PF) 판매(분양)하는 것이다. 이때 땅을 사기 위해 조달하는 대출이 브리지론이다. 예를 들어, 땅을 매입하는 데 100만원이 필요하다면 시행사 자금을 10%(10만원) 정도 넣고 나머지 90%(90만원)를 저축은행이나 증권사 등 제2금융권에서 최소 10% 이상 고금리를 주고 빌린다. 땅을 확보한 뒤 관할 관청에 ‘여기에 주상복합 또는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겠다’며 건축 인허가를 신청한다. 이때 주요 건설사의 책임 준공 확약과 함께 인허가를 받으면 본PF로 전환되며 공사비용을 조달(파이낸싱)할 수 있다. 즉, 공사비용이 100만원 든다면 본PF에서 200만원을 빌린 뒤 땅 사려고 빌린 90만원(브리지론)을 갚고 나머지 돈 110만원 정도를 공사비로 쓰는 구조다.
키움증권 측은 “현재 우선수익자인 선순위 투자자가 담보 토지에 대한 공매 신청을 결정했으며 공매 개시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번 브리지론의 중순위(메자닌) 대출채권은 A투자증권이 리테일 전문 투자자를 대상으로 판매했다. 투자자들은 주관사 키움증권과 판매사 A투자증권을 상대로 분쟁을 벌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만기 연장 과정에서 선순위만 차별적으로 금리 상향 조정이 이뤄지고 중순위와 후순위는 이를 제대로 공지받지 못했기에 종전과 동일한 조건으로 만기 연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키움증권과 A투자증권은 서로 책임 공방을 벌인다. 키움증권은 “대출 만기 연장은 투자자 전원 동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A투자증권에서 사모사채 투자자에게 금리 조정에 대한 내용 공유 없이 만기 연장에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최초 만기 연장 시 각 투자자들에게 연장금리 동결을 요청했으나 선순위 중 일부 투자자가 내부심의 통과 요건을 들어 연장금리 인상을 요구했다”며 “이에, 기한이익상실(EOD)을 방지하고자 이를 수용하고 중·후순위 투자자에게 관련 내용을 공유했다”고 강조했다. 반면, A투자증권은 “선순위 투자자의 금리 상향 조정에 대한 고지를 주관사로부터 제때 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편다.
이번 디폴트 사례를 두고 시장 일각에서는 셀다운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금융사 모럴 해저드의 단면이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국내 부동산 PF 관련 대출채권은 개인 전문 투자자를 대상으로 강남권 지점 PB 등을 통해 ‘리테일 셀다운’이 이뤄질 때가 많다. 리테일 시장에 풀리는 대출채권은 대부분 메자닌(중순위)이다. 메자닌 투자자는 유사시 주로 금융사로 구성된 선순위 채권자의 자산 매각 처분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투자금 회수 순위도 1순위가 아니라 매각 과정에서 손실을 그대로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절차적 흠결이 빚어질 가능성도 높다. 적격 전문 투자자를 대상으로 사모채권을 판매했더라도 정보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만큼 거래 전 과정이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보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금융주관사가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한, 셀다운에 참여한 여러 투자자가 복잡한 부동산 PF 구조와 잠재 리스크를 속속들이 알기는 힘들다.
시장 일각에서는 셀다운이 난항을 겪자 부동산 대출채권을 한데 묶은 ‘셀다운 펀드’ 구성도 조심스레 거론되는 분위기다. 셀다운 펀드는 한데 묶인 대출채권 중 일부가 부실화하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잠재 부실이 전염될 수 있다. 이런 셀다운 펀드는 미국에서 경고등이 켜진 펀드담보부증권(CFO),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부채담보부증권(CDO)과 구조가 거의 비슷하다. 담보 자산 가치의 급락 땐 연쇄 디폴트 등 시장 전반의 유동성 손상으로 확산될 수 있다.
금융권은 이번 브리지론 디폴트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올 하반기 전국 부동산 PF 사업장에서 브리지론 만기가 줄줄이 돌아오면서 잠재 부실이 속속 터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땅만 매입한 상황에서 브리지론 디폴트가 나면 여기에 참여한 투자자는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하다. 프리미엄을 주고 산 땅을 개발을 위한 삽도 못 뜬 채 매각하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고수익 ‘메자닌’ 부메랑으로
IB업계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부동산 대출채권을 셀다운한 금융사와 투자자 간 분쟁이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증권사들은 개발 초기 단계인 브리지론에 주로 참여했고 이를 유동화한 중순위 대출채권을 개인 ‘큰손’에 주로 팔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개발이익 불확실성이 커져 브리지론에서 본PF로 전환되는 게 매우 까다로운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융사와 투자자 간 분쟁의 불씨가 언제든 피어오를 수 있다는 게 IB업계 시각이다.
무엇보다 이자 재원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본PF 전환이 차질을 빚고 브리지론 만기 연장이 반복될 때마다 모든 투자자의 금리를 올려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결국 본PF 전환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중순위 이하 투자자는 브리지론 만기 연장에 동의해주지 않을 경우 큰 손실을 보게 되므로 선순위 투자자의 의사 결정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악의 경우 본PF로 전환되지 못하고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하더라도, 선순위는 우선적으로 원금과 이자를 회수할 권리가 있지만 중순위 이하 투자자는 원금 손실을 피할 방도가 없다.
IB업계 관계자는 “브리지론 만기 연장 과정에서 시행사 재원에 부담이 있더라도, 선순위 투자자는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상대적으로 의사 결정 협상력이 떨어지는 중순위 이하 투자자는 원금 회수 가능성이 떨어질 수 있어 브리지론 부실이 가시화할수록 투자자 간 분쟁도 늘어날 수 있다”고 봤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4호 (2023.08.30~2023.09.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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