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신체절단·몽유병…여름 공포 공식 깬 9월 '소름주의보'

나원정 2023. 8. 28. 18:2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 '잠'.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악귀에 씐 듯한 몽유병 증세가 첫 아이를 얻은 신혼부부의 가정을 서서히 잠식한다(‘잠’). 외딴 산장을 찾은 산악바이크 동호회는 수십년 전 사건에 관한 끔찍한 괴담에 휘말리고(‘치악산’), 사이비 종교집단을 잠입 취재하던 기자는 은밀한 신체 절단 의식을 목격하게 된다(‘신체모음.zip’).
'여름엔 공포영화'란 공식은 옛말이 됐다. 오싹한 소재의 한국 공포영화가 9월 극장가를 잇따라 찾는다.
신인감독 6인이 각기 다른 신체 부위를 소재로 만든 옴니버스 ‘신체모음.zip’(30일 개봉)을 필두로, 배우 이선균‧정유미가 부부 호흡을 맞춘 ‘잠’(9월 8일 개봉), 인터넷 괴담을 익스트림 스포츠 액션과 접목한 ‘치악산’(9월 13일 개봉) 등이다. 공포‧스릴러로 장르를 확장하면 중고거래 범죄 실화에서 출발한 ‘타겟’(30일 개봉), 시골에 사는 두 여성의 섬뜩한 연대를 그린 ‘그녀의 취미생활’(30일 개봉), 결혼 1주년 기념 여행이 피로 물드는 ‘차박-살인과 낭만의 밤’(9월 13일 개봉) 등 6편에 달한다.


코로나 보릿고개 '공포' 생존법 됐다


극장 비수기 공포영화 개봉은 이전에도 있었다. 퇴마물 ‘검은사제들’(2015)이 11월 개봉해 544만 흥행을 기록했고, 정신병원 괴담 소재 ‘곤지암’(2018)은 3월 극장가에서 손익분기점의 3배가 넘는 267만 관객을 동원했다. 핼러윈 시즌용 해외 공포영화가 가을에 개봉하기도 했지만, 한국 저예산 공포‧스릴러 영화가 이처럼 일제히 개봉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배급상황 탓에 계절보다는 홍보 일정‧극장 경쟁상황 등을 분석해 배급일자를 정하게 됐기 때문"(‘치악산’ 배급사 와이드릴리즈 관계자)이란 분석이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등장과 팬데믹 보릿고개로 투자 자금줄이 마르고 시장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신인 창작자와 중소규모 영화사에게 공포영화가 새로운 생존법이 됐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잠’ 제작사 루이스픽쳐스 김태완 대표는 코로나19 시기 극장에서 살아남은 작품으로 ‘테마파크형 영화’를 들었다. “관객은 결국 롤러코스터, 귀신의 집 같은 짜릿한 체험을 하러 온다. 공포는 액션‧어드벤처와 함께 ‘체험형 장르’란 공통점이 있다”면서 “최근 미국에서도 마블‧DC 수퍼 히어로 액션 대작들이 주춤한 사이 공포영화가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손익분기점 도달 '옥수역 귀신'


실제 9월 공포영화들은 대부분 신인감독 작품으로, 순제작비 50억원 이하 중저예산 규모다. 올여름 200억~300억원대 한국 대작 영화들이 지난해보다 저조한 성적을 낸 상황에서 관객층은 상대적으로 좁지만, 충성도 높은 장르팬 타깃의 중소 공포영화가 실속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화 '신체모음.zip' 사진 싸이더스
28일 영화진흥위원회 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세 작품 중엔 저예산 공포영화 ‘옥수역 귀신’이 천만 영화 ‘범죄도시3’, 여름 대작 ‘밀수’와 나란히 포함됐다. ‘옥수역 귀신’은 호랑 작가의 동명 네이버 웹툰 원작의 인기, 일본 공포영화 걸작 ‘링’ 작가가 각본을 맡은 화제성에 힘입어 올 4월 개봉 이후 25만 관객이 봤다. 관객 수는 적지만, 예산이 워낙 작은 데다 한국 공포영화 수요가 꾸준히 있는 유럽‧아시아 지역 127개국에 선판매돼 수익을 남겼다.

아리 에스터·나홍진 키즈 잇따른다


‘유전’, ‘미드소마’의 팬덤에 힘입어 올해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들고 내한한 아리 에스터 감독 등 공포 거장들의 팬덤도 시장 형성에 한몫 했다. 한국에선 ‘곡성’을 연출하고 태국 공포영화 ‘랑종’을 제작한 나홍진 감독이 대표적이다. ‘신체모음.zip’, ‘치악산’을 최초로 소개한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모은영 프로그래머는 "아리 에스터, 나홍진 감독의 영향으로 굿‧설화 등 한국 소재를 접목한 포크 호러 계통의 경향도 나타나고 있는데다 ‘곤지암’ 같은 괴담 소재 작품들은 15세 관람가가 흥행 발판이 되고 있다"며 "유튜브를 통해 괴담을 많이 보는 10대들의 문화 소비 패턴과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영화 '치악산'. 사진 와이드릴리즈
공포영화는 한 사회의 무의식의 발로이자, 가장 근원적 공포를 건드리는 장르다. 신인 감독이 새로운 목소리를 내거나, 색다른 효과와 판타지를 펼치기도 좋다. 스티븐 스필버그(‘죠스’), 김지운(‘조용한 가족’) 등 거장의 등용문으로 꼽히는 이유다.
‘신체모음.zip’의 경우 팬데믹의 정점에서 한정된 공간, 마스크 속에 갇힌 채 서로가 서로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청년세대의 무한경쟁 풍토, 이웃 단절, 혐오가 일상이 된 사회를 귀신을 통한 복수극, 원격 퇴마술, 줄 하나에 목이 묶인 두 이웃 등 섬뜩한 상상에 담았다.
‘잠’은 '올바른 결혼생활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서 출발했다. 유명 괴담이 토대인 ‘치악산’은 원주시와 지명 사용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각본을 겸한 김선웅 감독은 “괴담은 관객 스스로가 그럴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공포가 크다”면서 “공포장르 관객층이 10~20대인 점을 고려해 산악자전거 장르인 ‘다운힐’의 짜릿한 액션을 가미했다”고 설명했다.
극장가의 '소름주의보'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추석 개봉 예정인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퇴마 소재를 코믹하게 비튼 작품이다. ‘블라인드’의 안상훈 감독, ‘더 웹툰:예고살인’의 김용균 감독 등 기성감독 5인이 참여한 옴니버스 ‘괴담만찬’도 다음 달 개봉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