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공산주의자’ 결론 낸 軍…교육계ㆍ학계 논의는 없었다

강태화 2023. 8. 28.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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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5명의 흉상을 철거하기로 한 군의 방침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다. 특히 진영을 떠나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군이 이념 논쟁의 핵심인 근ㆍ현대사와 관련해 정치 공방의 ‘플레이어’로 나섰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지는 분위기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홍범도 장군과 관련 지난해부터 공산당 입당 또는 그와 관련된 활동이 지적되고 있어서 (흉상 이전을)검토하는 것”이라며 “육사 뿐만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 장군의 흉상도 필요 시 이전이 검토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전 대변인은 2016년 명명된 잠수함 ‘홍범도함’에 대해서도 “홍범도 장군에 대한 검토가 이뤄진 뒤 필요하다면 이름을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논란의 발단은 육사가 교내 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범도ㆍ김좌진ㆍ지청천ㆍ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기로 한 결정이다.

육사는 흉상 이전 결정의 배경에 대해 “독립군ㆍ광복군 흉상들만 사관생도들이 학습하는 곳에 설치돼 위치의 적절성, 역사 교육의 균형성에서 문제가 있다”며 “홍범도 장군의 경우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으로 육사가 기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판단의 근거가 된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활동에 대해선 “최근 역사 연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활동 등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하지만 ‘재평가가 이뤄지는 중’이라는 군의 설명은 홍범도 장군에 대해 학계에서도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군이 일각의 역사 연구 성과를 근거로 홍 장군 흉상 이전을 자체 결정한 뒤 사실상의 선제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처럼 해석할 여지조차 있다.

군의 해석대로라면 홍범도 장군에 대한 재평가는 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를 완전히 새로 써야 하는 중대한 의사 결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 과정에서 군은 역사학계는 물론 교육계와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전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교육ㆍ역사학계, 교과서 집필 기관 등의 의견 수렴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한 채 “그분들의 조국 광복을 위한 기여와 공로는 충분히 인정한다”고 답했다. ‘이전을 위한 향후 검토 작업에 교육계가 참여할지’ 묻자 “교육부 등이 검토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뉴스1


이와 관련, 익명을 요청한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재평가와 관련해 군이 자체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역사학계에 아무런 협조를 요청한 바가 없다”며 “교과서 집필에 대한 기준은 명확한 규정에 따라 만들어지지만, 정부가 지금처럼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을 만들 경우 집필자들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실제 군의 주장대로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라는 결론이 내려질 경우 국사 교과서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현행 8종의 고등학교 검정 국사 교과서는 1920년대 무장 항일운동 단락을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와 관련한 기술로 시작하고 있다. 특히 봉오동 전투의 경우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홍 장군이 우선적으로 배치돼 있다. 만약 군의 결론대로 홍범도 장군이 한국군이 기릴 수 없는 ‘공산주의자’로 규정될 경우 학생들은 ‘공산주의자의 역사’를 항일 독립운동사의 첫 페이지로 공부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2020년 3월부터 새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가 도입됐다. 새로 도입된 중학교 '역사' 교과서 6종은 전근대사가 80%, 근현대사가 20%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은 전근대사 27%, 근현대사 73%로 구성됐다. 사진은 서울 시내의 한 대형 서점 역사 참고서 진열대. 뉴스1


사학자 출신인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독립 항일운동의 역사는 그동안의 연구와 국민적 공감대를 통해 대부분 확립된 상태”라며 “이를 뒤집는 판단을 군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군 스스로 역사의 엄중함에 대한 철학적 빈곤을 드러낸 것이자, 향후 군이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상황을 자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 교수는 이어 “특히 군이 스스로 이념ㆍ정치 논란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하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전직 고위 군 인사 역시 “군이 존재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진영과 정치와 무관하게 국가의 안위와 안보를 위한 나라와 국민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며 “그런데 군이 정치ㆍ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대사 논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군 스스로 나라와 국민이 아닌 특정 정치 진영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오해를 살 결정적 빌미를 자초하게 돼 개탄스럽다”고 했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논란이 확산되자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방부와 육사가 검토해 결정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국방부는 “국방부도 검토하겠지만, 육사에서 지난해부터 검토해온 사안”이라며 근본적 책임 소재가 육사에 있다고 밝혔다.

관련 논란이 이어지자 국방부는 이날 오후 별도 입장문을 내고 “독립운동가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이념전쟁과 친일행각으로 부추겨 정치 쟁점화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논란에 대한 책임을 ‘외부’로 돌렸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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