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 “일이 더 소중해졌다” [쿠키인터뷰]
살인죄로 붙잡혀 10년간 교도소에 복역한 여자는 얼굴에 생기가 없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짧은 머리, 기미가 덕지덕지 붙은 피부, 퀭한 눈동자와 눈 밑에 드리워진 그늘. 넷플릭스 ‘마스크걸’에서 죄수번호 1047로 불리는 김모미는 생에 의지를 잃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모미가 배우 고현정과 만나니 의미심장한 막이 생겼다. 1989년 미스코리아로 뽑혔던 미의 아이콘은 민얼굴에 다크서클과 기미를 그려 넣고 카메라 앞에 섰다. “(시청자가) 모미의 진심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는 고현정을 지난 24일 서울 역삼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은 고현정과 나눈 일문일답.
Q. ‘마스크걸’에 출연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가.
“전형적인 작품이 아니라 장르물인 점이 일단 좋았다. 한 인물(김모미)를 세 배우(이한별·나나·고현정)가 연기하는 기획도 마음에 들었다. ‘마스크걸’은 누군가 혼자 이고 지고 끌고 가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내가 퍼즐 조각으로 녹아들어야 하는 기획에 목말라 있었다.”
Q. 모미는 자신이 죽인 주오남(안재홍)의 엄마 김경자(염혜란)로부터 딸 김미모(신예서)를 구하려고 탈옥한다. 두 모성이 충돌하는 장면이 백미다.
“모성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없진 않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모성애는 보는 사람이 감상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배우가 나서서 모성애를 표현하려고 하면 신파가 되고 구태의연해진다. 내게는 미모를 구하는 일이 더 급했고, 거기에 집중했다.”
Q. 경자와 모미가 대치하면서 자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가.
“경자는 ‘비뚤어졌으나 당당한 모성’을 발휘한다. 반면 모미는 모성이 무언지 형태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다. 그런 두 모성이 부딪치니 할 수 있는 게 싸움뿐이다. 결국 경자와 모미는 모성으로 대결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성깔 때문에 싸운다고 봤다. 그게 현실적이다. 진짜 모성 때문에 싸웠다면 할 말이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을 위해 싸웠다.”
Q. 젊은 시절 모미를 연기한 배우 이한별과 나나 등 훌륭한 후배들이 ‘마스크걸’에 많이 출연한다.
“내게는 위협적이다.(웃음)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함도 든다. 그래도 세상엔 내가 할 일이 꼭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떤 환상에도 빠지고 싶지 않고 어디로 도망가고 싶지도 않다. 시대 감각을 잃지 말자는 게 배우로서 내 신념이다.”
Q. 다작(多作)하진 않는다.
“제 취약점이 불안할 때 오히려 화를 낸다는 거다. 무서워서 그런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도 미팅 과정에서 불안감이 들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마르고 닳도록 쓰여야 내게도 좋지 않을까, 그래야 건강하게 나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제작자들은 ‘고현정을 캐스팅하려면 주인공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내 출연작을 쭉 보면 알겠지만 혼자 주연한 작품이 거의 없다. 미실도 타이틀은 ‘선덕여왕’(MBC)이고 나는 중간에 죽는 설정이었다. 나는 늘 앙상블을 원했다. 관객도 한 번에 많은 배우의 다양한 연기를 보는 게 좋지 않겠나. 널린 소문에 오해하신 게 아닌지 제작자들께 되묻고 싶다.(웃음)”
Q. 여러 작품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는데도 개인사나 가십을 먼저 떠올리는 대중이 원망스럽진 않나.
“전혀. 나도 그 가십을 만든 공범임을 인정한다. 다만 무념무상인 상태로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이 크다. 개인사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을 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질 못했다.”
Q. 30년 넘게 톱스타로 살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
“더는 연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때도 있다. 너무 창피해서 이민 가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고현정은 1995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결혼하며 은퇴했다가 이혼 후 SBS 드라마 ‘봄날’로 복귀했다.) 돌아오니 저를 따뜻하게 반겨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들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곳은 없더라. 그걸 늦게 알아서 후회스럽다. 앞으로는 연기로 평가받고 일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일이 더 소중해졌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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