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위 얼굴로 우뚝 솟은 섬마을 소년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편집자말>
[황호택]
김대중(金大中, 1924~2009) 전 대통령은 신안군 하의도(荷衣島) 출신이다. 헌정사상 50년 만에 여당과 야당이 바뀌는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헌정사에 우뚝 솟은 인물이다.
하의도는 김 전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작은 섬. 목포에서 34km 떨어진 한반도 서남쪽 끝 섬마을 소년이 '큰 바위 얼굴'이 된 것도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유인도 9개, 무인도 49개로 이뤄진 하의도는 섬 전체가 논밭으로 가득 차 섬 같지 않은 느낌을 준다. 하의도에는 조선 중기부터 광복 후까지 갯벌을 메운 간척지가 많았다. 하의도에서 논과 염전은 옛 개펄이고, 산들은 새끼 섬이었다고 보면 된다.
▲ 하의도 김해 김씨 묘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석상들이 조성되어 있다. |
ⓒ 황호택 |
김대중 자서전 첫 장은 하의도에서 보낸 개구쟁이 시절이다. 뒷산에 소를 몰고 올라가 풀을 뜯기고 동무들과 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켜 우르르 내뺐다. 소년은 바다만 바라보면 가슴이 뛰었다. 후광(後廣)은 뒤가 넓다는 뜻이다. 마을 뒤편에 갯벌을 메운 너른 간척지가 있어 생긴 지명이다. 김대중은 후광을 아호로 삼았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포로 이사 갈 때까지 살았던 생가. |
ⓒ 황호택 |
김 전 대통령은 출생과 관련해 정적들의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침묵하다 자서전에서 비로소 공개한 것을 보면 평생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는 일흔 가까운 아버지 공흘과 10대 후반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어머니는 무녀(巫女)의 딸이었고 첩도 못되었다. 정상적인 혼인 관계가 아니라 야합(野合)을 통해 공자를 낳았다. 공자를 하늘같이 떠받드는 사람들이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풍습이다. 적서(嫡庶) 차별은 조선 태종 때부터 내려오다 해방 후까지 잔존했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였다. 바닷가나 섬 지방에서는 젊어서 상부(喪夫)를 하면 가산이 넉넉한 집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 호구를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일종의 복지제도였다.
장산도에서 명문가를 이룬 인동 장씨로 1,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염에게 DJ가 젊은 시절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홍염은 애국지사 장병준의 막냇동생이고 자신도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DJ 모친 장수금과 홍염의 정확한 촌수에 대해서는 장산도, 하의도 주민들의 말이 엇갈린다. 촌수는 차치하고 어머니 쪽으로 동성동본(同姓同本)이니 옛 풍습에 따라 형님이라고 했을 수 있다.
후광리 앞에는 너른 염전이 있어 사람들이 북적였다. 장수금은 염전 인부들을 상대로 국밥집을 꾸렸다. 그녀의 삶은 '팔자가 셌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자녀 교육에 열성인 여성'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신문 정치면을 샅샅이 읽은 소년
구장 집에는 매일신보가 들어왔다. 한글신문이라지만 한자투성이인 신문을 소년은 서당에서 익힌 실력으로 어려서부터 탐독했다. 특히 정치면을 샅샅이 읽었다.
아버지도 정치에 관심이 높았다. 6대 국회에서 한일 수교 문제로 진통을 겪을 때 윤보선 민정당 총재는 한일회담 결사반대라는 강경노선으로 치달렸다. 김대중 의원은 윤 총재의 '무조건 반대' 노선에 동조하지 않고 국익을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 의원이 원내외에서 상호 이익이 보장된 협상안이라면 야당도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자 "야당 첩자", "왕사쿠라"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이때 아버지가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들을 질책했다.
큰집에는 하의도에서 유일하게 축음기가 있어 이화중선 같은 명창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판소리 실력이 뛰어났고 그중 '쑥대머리'는 걸쭉하면서도 흥겨웠다. 춤도 능했다고 하니 다소 한량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옆에 농민들이 토지를 찾는 일에 힘을 보탠 사람들의 공적비가 서 있다. |
ⓒ 황호택 |
김 전 대통령은 세상을 뜨기 넉 달 전인 2009년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조선 중기 이래 하의 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농민들은 억울하게 빼앗긴 농토를 탈환하기 위한 피어린 투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DJ가 자랄 때 하의도는 섬 전체가 일본인 소작지였다.
인조 임금이 정명공주를 홍씨 집안에 시집 보내면서 하의도 농지를 하사해 4대손까지 세미(歲米)를 받도록 했다. 홍씨 집안은 8대손에 이르도록 땅을 돌려주지 않다가 경술국치(1910년) 무렵 일본 사람에게 팔아넘겼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길고 긴 투쟁이 시작됐다. 하의도 농민들은 1956년 국회에서 유상(有償)반환 결정을 얻어냄으로써 330여 년 만에 농토를 되찾았다. 김 전 대통령의 진보적 정치관도 농민운동의 정신에서 유래됐다는 시각이 있다.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옆에 농민운동 추모기념탑과 농민운동을 도운 인물들의 공적비가 서 있다.
DJ 진보정치에 흐르는 '농민운동' 정신
김 전 대통령의 스승 김연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거도 산중으로 옮겨 운둔 생활을 했으나 고향 주민들이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자 8년 만에 하의도로 돌아와 봉람제라는 서당을 열었다. 김 전 대통령도 이 곳에서 배웠다.
인근 섬에서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유림들이 1952년 선생의 집 후원에 덕봉강당(신안군 향토자료)을 세웠다. 바로 옆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이 평생 수집한 한·중·일 고서 4천여 권이 보존 전시돼 있다.
▲ 조각가 최 바오로는 하의도 옹곡항 주변에 대리석 천사상 318기를 세웠다.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는 천사상 1004기가 모두 자태를 드러내면 신안의 새로운 명물이 될 것이다. |
ⓒ 황호택 |
DJ가 태어난 원래 생가는 어머니가 국밥집을 꾸리며 3남 1녀를 키우기에 비좁았다. 손님들에게 국밥을 팔아 알뜰하게 번 돈으로 국밥집 옆 지금 '김대중 대통령 생가'가 있는 자리에 새집을 지었다.
비를 맞아도 썩지 않는다는 일본산 삼나무를 목재로 썼다. 여기서 목포로 이사 갈 때까지 살았다. 어은리 주민이 이 집을 사들여 해체해 삼나무 목재 등을 그대로 써서 집을 지었다. 이 집을 1999년 종친들이 다시 사들여 해체하고 옛 자리로 옮겨 복원한 뒤 신안군에 기증했다.
후광리 생가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택(名宅)과는 거리가 멀다. 갯벌을 메운 간척지에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나 배산임수의 지형이 나올 수도 없다. 생가 뒤를 키가 큰 신우대 숲이 둘러싸고 있다. 겨울에 후광리로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는 숲이다.
생가 옆 추모관에는 DJ 일생에서 주요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중에는 1981년 청주교도소 수감 시절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으로 가족들과 면회하는 DJ 뒷모습 사진이 있다. 면회를 감시하던 안기부 요원이 찍어 사적으로 보관해오다 DJ가 대통령이 된 뒤 기증한 사진이다.
신안군은 소금전시관을 정치역사 아카이브 홀로 리모델링해 한국 정치사의 주요 장면들을 담은 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단식 시위로 목포 유학 관철한 DJ
1936년 가을 김 전 대통령 가족이 목포로 이사했다. 그 전에 소년은 틈만 나면 목포로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떼썼다. 밥을 굶고 방안에 누워 단식 시위도 했다. 한번은 잠결에 아버지를 설득하고 있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대중이가 공부를 곧잘 하니 여기서 썩히지 말고 목포로 나갑시다. 장사라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웁시다."
▲ 하의도 해변 일주도로에서 바라본 큰 바위 얼굴. |
ⓒ 황호택 |
하의도 남서쪽에 죽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하의도 해안 일주도로 쪽에서 바라보면 죽도의 왼쪽 바위 절벽이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DJ가 대통령이 되면서 '큰 바위 얼굴'이라는 이름을 얻은 명소가 됐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는 죽도의 바위 절벽이 앞발을 벌리고 있는 사자의 형상 같기도 하다. 옛날에는 이 바위를 '사자바위'라고 불렀다. 고승(高僧)과 수사자와 호랑이가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큰 인물이 나오면서 바위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일주도로 포토존에는 2009년 김대중 이희호 부부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이 전시돼 있다. 김대중의 영원한 고향 하의도에는 연중 'DJ 관광객'이 몰려들어 인근 섬들의 부러움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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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삼인, 2022 김택근, 《새.벽. 김대중 평전》, 사계절, 2012 이재언, 《한국의 섬 신안군 2》, 이어도, 2021 이희호, 《동행》, 웅진지식하우스, 2019 최성환, 《신안여행을 위한 문화관광 가이드북》, 신안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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