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발생한지 32년,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양형석 2023. 8. 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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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유괴 실화 사건 영화화한 <그놈 목소리>

[양형석 기자]

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의 시작을 알렸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류(신하균 분)와 영미(배두나 분) 커플이 아픈 누나(임지은 분)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진(송강호 분)의 딸 유선(한보배 분)을 유괴한다. 하지만 유선은 강가에서 뜻밖의 사고로 숨을 거두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동진은 딸을 유괴한 류에게 복수를 한다. 누나를 살리겠다는 착한 의도였지만 류와 영미의 유괴는 결국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됐다.

'복수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훨씬 더 악질적인 유괴범이 등장한다. 단지 '요트를 사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구를 위해 금자씨(이영애 분)의 딸 제니(권예영 분)를 비롯해 무려 5명의 아이를 유괴하고 그 중 4명을 살해한 빌런 백선생(최민식 분)이었다. 결국 백선생은 13년 반 동안 복수를 계획한 금자씨에게 붙잡히게 되고 피해자 가족들에 의해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를 당한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을 만들면서 원작이 있는 <올드보이>를 제외한 나머지 두 작품에서 '영·유아 유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 영·유아 유괴만큼 그 동기가 악질적이면서 피해자 가족들을 괴롭게 하는 범죄도 찾기 힘들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많은 유괴사건들 중에서 1991년에 있었던 이 사건은 2007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들의 공분을 샀다. 바로 박진표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였던 '현상수배극' <그놈 목소리>였다.
 
 '현상수배극'을 표방한 <그놈 목소리>는 2007년2월에 개봉해 314만 관객을 동원했다.
ⓒ CJ ENM
 
실제사건 모티브로 만든 한국의 범죄영화

사실 범죄영화만큼 시나리오가 중요한 장르도 드물다. 다른 장르는 배우의 연기와 미장센 등 다른 요소를 통해 영화의 매력을 끌어 올릴 수 있지만 범죄영화는 설정 구멍이나 이야기의 허술함이 영화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각본의 빈틈이 생길 여지가 크게 줄어든다. 할리우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 이유다.

오늘날 관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범죄영화는 역시 2003년에 개봉했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지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의 모 지역에서 10명의 피해자가 나왔던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지난 2019년 최초사건발생 33년 만에 진범 이춘재가 검거됐다. 

통칭 '개구리소년 사건'으로 알려진 대구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도 대표적인 미제 사건 중 하나다. 지난 1991년 도룡뇽알을 주우러 인근 산에 올라간 5명의 어린이가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백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지난 2011년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개봉됐다. 이춘재 사건 만큼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영화화되면서 화제가 됐지만 전국 186만 관객으로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4885"라는 명대사를 남긴 <추격자>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추격자>는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10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20명을 살해한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유영철 사건은 국내 대중들에게 '싸이코패스'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추격자>에서도 지영민을 연기한 하정우의 소름 끼치는 싸이코패스 연기가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2011년 <평양성>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면서 상업영화 감독 은퇴를 선언했던 이준익 감독은 2013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원>을 만들었다. 8세였던 여아를 납치해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을 영화화한 <소원>은 제작사에서 파해자의 가족에게 제작여부에 대한 사전 동의를 얻고 만들어졌다. <소원>에서 소원을 연기했던 이레는 영화 <반도>와 드라마 <지옥>,<무인도의 디바> 등에 출연하며 청소년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들 잃은 부모연기 보여준 설경구와 김남주
 
 방송국 메인뉴스 앵커를 연기한 설경구는 아들의 유괴 후 무너지는 아버지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
ⓒ CJ ENM
 
<그놈 목소리>는 국민앵커로 불리는 한경배(설경구 분)의 아들이 유괴범(강동원 분)에게 납치 당하면서 벌어지는 부모의 사투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놈 목소리>는 1991년에 있었던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흔히 강력범죄들은 피해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가해자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고 있다. 하지만 199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영호군 유괴 살인사건은 사건발생 32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의 이름이 앞에 붙어 있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직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박진표 감독도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실제 범인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들려주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박하사탕>의 김영호, <오아시스>의 홍종두, <공공의 적>의 강철중 등 사연 있고 거친 역할을 주로 연기했던 설경구에게 뉴스앵커 역할은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설경구가 연기한 캐릭터는 잘 나가는 뉴스앵커가 아닌 아들을 유괴 당한 무기력한 아버지였다. 집에서 아내를 위로하던 교인들을 쫓아내던 한경배는 영화 후반 놀이공원에 아들이 있다는 범인의 말에 차를 버리고 그 장소로 뛰어가면서 신에게 기도를 한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의 김남주는 2001년 <아이 러브 유> 이후 6년 만에 <그놈 목소리>에 출연했다. 2005년 동료배우 김승우와 결혼해 같은 해 11월 첫째 딸을 출산한 김남주는 <그놈 목소리>에서 아들을 유괴 당한 엄마 역을 잘 소화했다. 김남주는 남편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범인과의 약속장소에 나간 후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가슴을 40여 차례 내리치며 오열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실제 멍이 들 정도로 연기에 몰입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PD 출신의 박진표 감독은 PD 시절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취재를 한 것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박진표 감독은 2년 후 루게릭 병을 앓는 남자와 그를 간호하는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김명민, 하지원 주연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극한직업>,<멜로가 체질>의 이병헌 감독이 각본에 참여한 이승기, 문채원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오늘의 연애>를 연출했다.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나오는 미남배우
 
 <그놈 목소리>에서 '그놈'을 연기한 강동원은 122분의 런닝타임 동안 한 번도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 CJ ENM
 
2023년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2007년 당시 강동원은 <늑대의 유혹>과 <형사 DUELIST> 등을 통해 최고의 비주얼을 자랑하는 20대 배우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강동원이 <그놈 목소리>에서 영화 내내 얼굴 한 번 제대로 나오지 않는 유괴범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관객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동원은 <그놈 목소리>에서 목소리 연기와 실루엣 출연 만으로도 충분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영화 속 유괴범은 한경배가 전화를 기다리다 지쳐 차 안에서 잠시 조는 사이 사각지대에 숨어 있다가 운전석 창문에 한경배를 조롱하는 메모지를 붙이고 유유히 사라질 정도로 상당히 영악한 싸이코로 묘사된다. 강동원은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없군요", "아드님을 위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드님이 죽기를 바라죠?"처럼 실제 범인이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대사들을 영화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김영철이 연기한 김욱중은 <그놈 목소리>에서 무능한 경찰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다만 김욱중 형사 역시 범인을 잡고 싶어하는 열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고 영화 후반에는 한경배에게 범인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전달했다. 김영철은 영화 중반 김욱중이 옷이 벗겨진 채로 길거리에 버려지는 장면이 있어 열심히 몸을 만들고 있었는데 예정보다 촬영이 앞당겨 지는 바람에 영화에서 원하는 몸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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