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매매도 OK"…돈 찍다 폭망한 아르헨, '전기톱맨' 떴다
남미의 좌파 포퓰리즘인 페론주의(페로니즘)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가 대선을 앞두고 전례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있다. 현지 매체 부에노스아이레스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24일(현지시간) 아르헨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강도·약탈이 일어나 약 200명이 체포됐다. 왓츠앱 등 소셜네트워크(SNS)에서 슈퍼마켓과 상점에 침입해 기물을 부수고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약탈 동영상’이 유행처럼 퍼지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서부 멘도사, 중부 코르도바 등 대도시에서 비슷한 사건이 150건 이상 벌어졌다.
정부는 화살을 야권 후보로 돌리고 있다. 지난 13일 대선 예비 투표(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포퓰리스트’이자 자칭 ‘무정부 자본주의자’ 하비에르 밀레이(52)를 배후로 지목하면서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 사건은 조직된 범죄”라고 했고, 그의 대변인 가브리엘라 세루티는 “이 흐름엔 밀레이와 추종자들의 SNS가 있었다”며 “그들을 주범으로 봐야 한다”고 공격했다. 반면 밀레이는 자신의 연루를 강하게 부인하면서 “정부 자체가 약탈의 배후”라고 반박했다.
밀레이는 이번 경선에서 ‘전진하는 자유’의 단독 후보로 출마해 전체 득표율(30.04%) 1위를 기록했다. 총 711만 표를 얻어 집권 여당 ‘조국 연합’의 선두 후보 세르조 마사 현 경제부 장관(507만표)보다 200만표를 더 받았다. 제1야당인 ‘변화를 위한 함께’ 패트리샤 불리치 전 안보 장관(402만표)보다도 많았다. 오는 10월 22일 치러지는 본선에선 밀레이·마사·불리치 등 세 후보가 각 진영의 대표로 뛰게 된다.
경제학자이자 라디오 진행자 출신인 밀레이는 사실상 정치 문외한 상태에서 2년 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현지 언론들은 그를 ‘헝클어진 머리, 가죽 재킷, 미국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름을 딴 5마리의 개를 기르는 독신남’으로 묘사한다.
그는 외모만큼 독특한 세계관을 내세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선거 기간 전기톱을 들고 있는 자신의 인형을 만들어서 다니면서 “과도한 정부 지출을 톱으로 과감히 잘라내겠다”고 공언하는 식이다. 이른바 ‘전기톱 계획’이다. 밀레이는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을 폭파해야 한다. 페소 대신 달러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총기 소유, 장기 밀매의 합법화도 옹호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그를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고 묘사했다.
초인플레, 2주새 가격 두배
실제 아르헨티나 경제는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올해 6월 기준 연간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115%를 찍었다. 국민 10명 중 4명은 빈곤 상태에 놓였고, 화폐인 페소는 휴짓조각이 됐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월급을 받으면 곧장 생필품을 사러 달려간다. 물가가 오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돈을 쓰기 위해서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시장에서 계란 한 판 가격은 지난 5월 1520페소(약 5750원)에서 이달 17일 2200페소(약 8300원)로 45% 뛰었다. 이곳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에르네스토 아쿠나는 로이터 통신에 “아이스크림 가격이 2주 만에 두 배가 뛰었다”며 “매일 가격을 조금씩 올려야 할 판”이라고 털어놨다.
전체 인구의 40%에 달하는 빈곤층은 지역 무료 급식소에 의존하거나, 도시 외곽 쓰레기장에서 버려지는 과일·채소 더미를 뒤져 끼니를 해결한다. 11살 난 딸을 키우는 파에스는 AP 통신에 “급식소에서 내가 받은 음식은 조금만 먹고 뒀다가 저녁에 아이가 배고파하면 준다”며 “자식이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암시장에서 조금씩 바꾼 ‘블루 달러(비공식 환전을 의미)’를 침대 밑에 모으는 것이다. 미화 100달러(약 13만2500원)짜리 한 장을 얻으려면 평범한 아르헨티나 청년의 한 달 치 월급 절반을 써야 한다. 정부의 공식 환율은 1달러당 350페소지만 서민들에게 가까운 암시장 달러는 500~600페소에서 거래된다. 극단주의자 밀레이의 부상은 이 같은 ‘시한폭탄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대로 가다간 또 국가 부도"
그랬던 ‘풍요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으로 한 세기 만에 경제적 수렁에 빠졌다. 아르헨티나 정치의 주류인 페론주의자들이 현금 남발성 복지 정책을 펼쳐서다. 이들은 후안 도밍고 페론(1946~1955년)의 정책 이념을 계승하는 이들이다. 계파는 다양하지만, 기업의 국유화, 공공의료·대중교통 등 공공지출 확대, 현금성 보조금 지급, 통제적인 환율 정책 등이 공통적이다. 군부 독재 기간(1976~1983년)을 제외하고 이들은 대부분의 선거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독식했다.
2019년 임기를 시작한 페르난데스 대통령도 온건 페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 역시 코로나19가 터지자 노동자들에게 ‘인당 1만 페소 지급’ 같은 현금성 보조금을 뿌렸다. 인구의 50%가 무상으로 이용하는 공공의료, 막대한 버스 보조금 등 정부 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했다.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페소를 마구 찍어냈다.
부통령인 부인 키르치네르, 기본소득 주장
정부가 환율을 틀어쥐고 있는 외환 시장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아르헨티나는 2018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00억 달러의 차관 계획이 승인됐지만, 정부는 추가 대출을 협상하고 있다. IMF에서 돈을 빌려 IMF의 빚을 갚는 ‘돌려막기’를 하기 위해서다. “이대로 가다간 10번째 국가 부도는 확정적”이란 말이 나온다.
이번 정부의 실질적 실력자는 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가 꼽힌다. 자신이 2007~2015년 대통령을 지냈고,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 집권, 2010년 사망)에 이어 20년 가까이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과거 “정부가 통화를 발행하는 것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지난해엔 의회를 통해 전국 18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50달러(약 6만 6000원) 기본소득’ 법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당선 땐 아르헨 우클릭 확실시
일각에선 밀레이의 비현실적 정책 탓에 최종 당선 가능성을 작게 보기도 한다. 앞서 페르난데스 정부는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과 총 1650억 위안(약 29조9000억원)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다. 중국과의 통화 스와프 규모는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부채 상환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준비금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실제 중국과의 단절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의미다. 공공 지출의 대규모 삭감도 대량 해고 없인 어렵다. 노조가 강한 아르헨티나의 국민 정서상 관철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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