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나의 축구대회 해방일지
대회 첫날 탈락했으면 좋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해본 적 있다. 기자협회 축구대회 얘기다. 연습한 게 아깝고 막상 뛰면 승부욕이 불타오르지만, 한두 경기는 이기되 첫날 마지막 경기를 ‘졌잘싸’로 마무리하며 축구에서 해방되길 바랐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죽자사자 뛰며 본능적으로 승리를 바라게 될 때면, 인간은 속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존재라고 느꼈다.
1972년 시작된 기자협회 축구대회는 올해로 49회째다. 대회는 꾸준히 남성들을 위한 잔치라고 비판받았다. 제법 축구를 좋아함에도, 축구대회가 마냥 잔치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입사 초기부터 축구와 업무 사이에서 눈치가 보였고, 마음이 불편했다. 수습 시절에는 골대 뒤로 가서 선배들이 차는 공을 줍고 뒷정리를 했는데 남이 찬 공을 종일 줍는 건 이등병 때 이후 처음이었다. 내 마음은 늘 반으로 쪼개져 땀 흘리는 쾌감과 운동장 밖의 불편함 사이를 오갔다. 많은 저연차 기자에게 기협 축구는 긴장의 자리다. 긴장은 의욕이 육체를 앞서게 한다. 이 때문에 동기와 후배는 축구를 하다 무릎을 심하게 다쳐 수술과 재활을 했다.
기자협회는 올해부터는 여성 풋살대회를 열었다. 김동훈 기자협회 회장은 “축구 대회가 마초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면서 “여성들을 위한 행사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 여성 풋살대회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대회 소식을 듣고 협회가 기획력과 상상력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출사표를 던진 여성 동료들이 팀을 꾸리고 자발적으로 즐겁게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이들이 있어야 할 곳은 응원석이 아닌 운동장”이란 말에 백번 수긍이 갔다. 대회 당일 회사 단톡방 곳곳에는 한 후배가 우아하고 호쾌하게 골을 넣는 영상이 퍼졌다. 남녀 선후배들의 환호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전율을 느꼈다.
즐겁게 공 찰 권리를 누리는 여성 동료들을 보며 문득 이런 결심을 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올해는 축구대회에서 해방되어보자. 불참 의사를 밝히자 축구팀 선배는 쿨하게 받아줬다. 나는 이것이 여성 대회가 만든 분위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즐겁게, 억압 없이 공을 차는 분위기 말이다. 축구는 화합의 스포츠니까. 네덜란드 남성이자 여성학자인 옌스 판트리흐트는 『남성해방』에서 “남성과 페미니즘이 만나는 지점은, 남성이 초래한 문제가 남성이 겪는 문제가 될 때다. 남성은 남성성과 관련 있는 온갖 문제를 겪는 동시에 남성성 때문에 온갖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마초적인 축구대회는 일부 남성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여성 대회의 등장이 변화의 실마리가 된 것은 아닐까. 남녀가 평등하게 땀을 흘리고 공을 찰 수 있게 된 올해가, 일부 남성 기자들이 더는 불편한 축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 원년으로 기록되었으면 한다.
여성국 IT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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