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전 5패, 세계의 벽 절감… 그래도 다시 뛰어야죠”
5전 0승 5패, 11득점 53실점. 기적은 없었다. 기록지는 냉엄했다. 미국 캐나다는 물론이고 약체 홍콩에마저 졌다. 월드컵 결선 라운드 진출을 목표로 야심차게 닻을 올린 한국 여자야구의 현주소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국내 최초로 여자 초등 야구부가 문을 연 게 불과 두 달 전 일이었다. 실업팀이 없으니 국가대표팀도 전원 사회인·학생일 수밖에 없었다. 으레 그러듯 감독 이름을 따 배에 빗대자면 2023년 양상문호는 ‘통통배’에 가까웠다.
그래서 의아했다. 무엇이 2007년생 고등학교 1학년부터 1987년생 왕언니까지 20명을 한데 모았을까. 또 일평생 프로야구판에서 잔뼈가 굵은 엘리트 지도자는 왜 난데없이 조타석에 앉았을까. 지난 22일 양상문(62) 감독에게 직접 물었다.
“야구를 향한 사랑이죠.” 양 감독의 답은 명료했다. 2019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에서 물러난 뒤 해설 마이크를 잡았던 그는 2022년 말 여자야구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프로야구 코치와 감독, 단장을 두루 역임하고 남자 국가대표팀 수석코치까지 지낸 베테랑 지도자에게도 여자야구 사령탑은 생소한 도전이었다. 2016년 부산에서 열린 여자야구 월드컵 당시를 떠올린 양 감독은 “솔직한 말로 ‘여자도 야구 하는구나, 근데 별 재미는 없네’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를 움직인 건 선수들의 열정이었다. 열악한 제반 환경에도 ‘야구 하고 싶다’는 뜻 하나로 뭉친 이들의 태도를 접하면서 마음이 동했다. “이 친구들에게 직업 야구인으로서의 미래는 없어요. 순수하게 그냥 좋아서 하는 거거든요. 뭐라도 돕고 싶다(는 마음). 그게 시작이었죠.”
가보지 않은 길이 부담스럽진 않았을까. 양 감독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부담을 느낄 처지가 아니었다는 취지다. 성적을 떠나 국민 한 명이라도 더 여자야구의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정근우 이동현 등 프로 무대를 주름잡았던 스타 선수들도 코치로 합류해 힘을 보탰다.
내부자가 된 뒤 피부에 와 닿은 여건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열악했다. 무엇보다 훈련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들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팀 차원의 연습은 일주일에 주말 이틀이 고작이었다. 아는 것 이상으로 체화가 중요한 스포츠 분야에선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는 “기술적으로 늘지 않는 이유가 분명했다”며 “닷새 훈련하고 이틀 쉬어도 잘 될까 말까 한데 거꾸로니 체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본기도 부족했다.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야구를 배운 선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던지고 잡고 달리는 것부터 다시 지도했다. 실전 경험 부족 탓에 어려울 수 있는 야구 경기 흐름이나 세부 규정도 반복 훈련으로 몸에 익게 했다. 가르침에 목말랐던 선수들은 코칭 스태프의 조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평업주야’, 주중엔 뿔뿔이 일터로 흩어졌다가 주말이면 경기도 화성 드림파크로 모여드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매분 매시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멀리 부산이나 경남 창원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선수들을 위해 ‘언니’들은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잠을 줄여 가며 자차를 몰아 화성에서 광명역까지 동생들을 태우러 다녔다. 양 감독이 웃음 지으며 물었다. “아름답지 않아요?”
대표팀은 지난 5월 홍콩에서 열린 아시안컵을 3위로 마쳤다. 2017년 초대 대회 이후 2회 대회에서 뺏겼던 동메달을 다시 찾아 왔다. 세계 랭킹 수위권을 형성한 일본과 대만에 밀렸지만 분명한 희망을 봤다.
기대 속에 지난 8일(현지시간) 캐나다 선더베이에서 월드컵 예선이 막을 올렸다. 목표는 결선 진출이었다. 미국 캐나다가 버티고 있는 만큼 조 2위 안에 들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판단했다. 와일드카드를 노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려면 홍콩·멕시코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불과 두 달여 전 아시안컵에서 콜드게임으로 대파했던 홍콩에 8대 9 한 점 차로 졌다. 수비가 문제였다. 한 경기 6개의 실책이 쏟아지면서 발목을 잡았다. 시속 120㎞를 웃도는 강속구에 초점을 맞춰 훈련했는데, 정작 홍콩 투수들의 구속이 이를 한참 밑돈 것도 영향을 줬다. 코칭 스태프와 선수 모두에게 이번 대회 가장 아쉬웠던 승부였다.
반전을 노렸지만 미국에 0대 14 콜드게임, 호주에 3대 10으로 지면서 사실상 예선 탈락이 확정됐다. 끝내 멕시코와 캐나다에도 패배한 대표팀은 조 최하위로 예선을 마쳤다.
세계의 벽은 한층 높아져 있었다. 전력 분석을 위해 참고한 3년 전 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량이었다. 양 감독은 “과거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기력을 봤을 땐 우리가 이기진 못해도 재밌는 경기를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었다”며 “수 년 만에 완전히 달라졌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체격 조건이나 기초 운동능력에 기술적 격차까지 더해지니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또 다른 강호 캐나다를 23대 0으로 제압할 정도였다. 양 감독도 찬사를 보냈다. “미디어데이 당시 미국 감독이 호기롭게 ‘미국 야구가 최강이란 걸 보여주겠다’고 하기에 속으로 뭐 저리 자신만만한가 했다. 직접 보니 그럴 만하더라.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진한 아쉬움 속에도 수확은 있었다. 큰 무대 경험을 쌓았다는 점이 특히 값졌다. 기록이 성장을 증명했다. 첫날 홍콩전에서 무더기로 쏟아졌던 실책은 마지막 경기 캐나다전에서 1개로 줄었다. 양 감독은 “야구가 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앞으로 계속 태극마크를 달 선수들인 만큼 중요한 성과”라고 강조했다.
눈에 띄게 발전한 선수들도 있었다. 미국전에서 1⅓이닝 동안 삼진 3개를 곁들여 1실점 호투한 고등학생 곽민정은 차기 에이스 자리를 예약했다. 대회 전부터 공·수 양면에서 핵심으로 꼽힌 박주아, 홍콩전 적시타 포함 3출루로 맹활약한 박소연 등도 눈도장을 찍었다. 신누리 안수지 양서진 주은정 등 외야진의 수비 역시 호평받았다.
대표팀의 예선 라운드 탈락은 곧 양 감독의 계약 종료를 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인연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선수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서겠다는 것이다. 대회 직후 시기를 놓친 뒤풀이도 하고 싶다고 했다.
국내 여자야구 실태를 두곤 쓴소리를 쏟아냈다. ‘야구로 먹고 살길이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는 “전국체전 종목이 아니니 실업팀이 없다. 진학 측면에서도 메리트가 없다. 전용 야구장도 없어 구장을 확보할라치면 사회인 야구팀에 밀리기 일쑤다. 인프라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아시안컵 동메달을 계기로 여자야구를 전국체전 종목화하는 사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얘기다.
이는 고스란히 대표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당장 팀 구성부터가 쉽지 않다. 휴가를 쓰거나 학교를 빠져야 해서다. 이번 대표팀을 꾸리는 과정에서도 난색을 보이는 선수들을 감독이 직접 설득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빚어졌다. 어학연수를 가야 해 상비군에서 빠진 선수, 개인 사정 때문에 끝내 대회 출전을 고사한 선수도 있었다.
결국엔 ‘판이 깔려야 한다’고 양 감독은 강조했다. 그래야 여자야구가 살고 장기적으로 한국 야구 전체에 보탬이 된다는 얘기다. “야구를 잘해서 대학을 가고 실업팀에 들어갈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지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여자 선수들이 나올 겁니다. 야구를 좋아해 주고 야구장을 찾는 여성들도 늘어날 거고요. 여성들이 단순히 구경하는 걸 넘어서 야구를, 스포츠를 직접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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