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연애를 끝내던 날, 그에게 한 말 [난 네게 반했어]

김은비 2023. 8. 2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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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게 반했어 챌린지]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콘텐츠가 넘쳐 나는 시대, 당신에게 딱 맞는 책이나 영화, 노래를 배달해 드립니다.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면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난 네게 반했어 챌린지'는 다음 필자를 지목하는 릴레이 연재입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해 주세요. <편집자말>

[김은비 기자]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스틸컷
ⓒ 더쿱
※ 작품에 대한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곁엔 도도가 있다. 도도와 있으면 편안하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어떤 말이든 하고, 쉽게 장난치고 금방 사과한다. 기뻐하다가도 5분 뒤에 우울해하거나 화를 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도도는 살벌하게 욕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면 응원해 주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해도 지지해 준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함께 간다.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의 주인공 나나미는 마시로를 만나기 전까지 어디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나나미는 시간제 교사다. 학생들에게 목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마이크를 사용하라는 조롱을 받을 때도, 돈이 부족해 일하는 학교에서 떨어진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교 동창을 마주쳐서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어색해한다.

맞선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하는 과정에선 여러 번 거짓말을 한다. 이혼한 부모님이 사이가 좋은 것처럼 꾸미고, 친척이 너무 없으면 부끄럽다는 남자의 말에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를 고용한다. 학교에서 해고를 당하지만 남편에게는 결혼을 이유로 그만뒀다고 둘러댄다. 나나미는 외도를 했다는 억울한 오해를 사고 이혼당한다.

다른 주인공 마시로(립반윙클)는 외롭다. 가족과 연을 끊고 AV(성인용 비디오) 배우로 일한다. 사람들이 직업을 물어보면 여배우라고 애매한 거짓말을 한다. 마시로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새벽까지 일하거나 술을 마신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마시로의 사랑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중 한 장면
ⓒ 유튜브 영상 캡처
 
이혼 후 집에서 쫓겨나 묵던 숙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내던 나나미는 SNS에서 알게 된 아무로의 제안으로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마시로를 만난다.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 놀자고 한다. 나나미는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마시로 같은 사람을 기다려 온 것 같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나나미와 마시로는 즐거워 보인다.

나나미는 아무로를 통해서 마시로가 집주인인 저택에서 입주 가정부로 일하게 된다. 마시로는 자신도 이 집의 가정부라고 거짓말을 한다. 나나미와 마시로가 함께 살게 된 뒤로, 마시로는 불쑥불쑥 나나미를 찾아간다. 일을 마치고 새벽에 집에 와서 나나미 위로 쓰러진다. 잠이 덜 깬 채 수고했다고 말하고 다시 잠든 나나미의 얼굴을 쓰다듬고 심장소리를 듣는다. 마시로와 나나미는 같은 메이드복을 입고 화단에 물을 주고 호스로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친다.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을 싸서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달린다. 둘이 함께 아는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마시로가 저택의 집주인이고, 나나미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나미는 가정부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 자신과 저택에 돈을 낭비하지 말고 스스로를 소중히 돌보라고 말하며 운다. 마시로는 나나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난 이 눈물을 위해서라면 뭐든 버릴 수 있어. 목숨도 버릴 수 있어"

둘은 '허름해도 둘이서 오래도록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로 한다. 함께 살 집을 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웨딩숍을 가게 된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시로의 얼굴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작은 식장에서 나나미가 상상 속에서 만든 반지를 끼워주는 장면이었는데, 마시로는 곧 울 것 같은데 웃음이 새어 나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엔 외로움도, 불행도, 초조함도 없어 보였다. 모든 순간이 빼곡하게 행복한 얼굴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빨간 차를 타고 달리는 두 사람. 둘만의 저택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신다. 함께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춘다. 그러다 침대로 털썩 눕는다. 누워서 입을 맞추고, 장난을 치던 중 마시로가 말한다.

"난 말이야, 편의점이나 슈퍼에서 장을 볼 때 점원이 내가 산 물건을 부지런히 봉투에 넣어 주는 걸 보면 나 따위를 위해서 저 손이 분주히 움직이는구나 생각해. 나 따위를 위해서 분주히 과자를 담아주는 거야, 그 손이. 그걸 보고 있으면 가슴이 꽉 조여오면서 왠지 울고 싶어져. 나한테는 행복의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은 한계가. 그 누구보다도 그 한계가 빨리 오지. 내 한계는 개미의 한계보다 빨리 와. 잊지 마. 이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다들 정말 잘 대해 주지. 택배 아저씨는 내가 말한 장소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주지.

비 오는 날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쉽게 행복이 오면 난 깨져 버려. 차라리 돈을 지불하는 게 편해. 돈은 아마 그런 걸 위해 존재하는 걸 거야. 타인의 진심이나 친절함 같은 것들이 너무 또렷이 보이게 되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고마워서 다들 깨져 버릴 거야. 그래서 다들 돈을 지불하며 그런 걸 안 보려 하는 거야. 말하자면 친절하단 거야. 이 세상은. 그래서 난 돈을 주고 사. 돈으로 사지. 한계니까 어쩔 수 없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깨져 버린다고..."

사실 말기 암 환자였던 마시로는 혼자 죽는 게 두려워서 나나미를 가정부로 고용해서 같이 죽으려고 했다. 조건은 월급 백만 엔(천만 원)이었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나나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곁에 머무른다면 마시로는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나나미가 자신에게 돈 낭비를 하지 말고, 둘이 살 집을 구해서 함께 살자고 했을 때 마시로는 얼마나 마음이 깨졌을까. 함께 누워서 잠들기 직전에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묻는다. 내가 같이 죽자고 하면 죽어줄 거냐고. 나나미는 좋다고 답한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마시로는 결국 혼자 죽는다.

도도의 사랑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스틸컷
ⓒ 더쿱
 
나에게 도도는 나나미의 마시로(립반윙클) 같은 존재다. 도도와 나는 7년 전 대학교 사회과학학술동아리에서 만났다. 자본주의, 페미니즘, 노동권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함께 공부하고 교내에서 세미나와 집회를 열고 행동하는 동아리였다.

도도는 말하기보다 눈을 가만히 맞추고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궁금한 게 있거나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말하지 않았다. 작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판단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인 눈빛이, 호랑이코와 닮았다고 자주 말했던 코가, 짙은 눈썹이 좋았다. 동아리에서 도도는 말수가 적고 조용해서 AI 같다는 놀림을 받았다. 도도는 조용한 게 아니라 고요와 침묵을 가진 사람이었고, 로봇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데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도도와 부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광안리를 걷다가 둘 다 공원이 가고 싶어서 40분을 걸어서 간 자성공원에서 오래 머물렀다.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 머무는 걸 둘 다 시간 아까워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던 오르막길과 동백나무가 기억난다. 늦겨울의 풍경과 공원을 찾던 동네 주민들을 구경하며 언제 흩어져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도도와는 지루하지 않게, 편안하게 영원히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무튼, 비건>을 읽고 채식을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됐을 때, 도도는 동물권을 공부하고 함께 채식을 시작했다. 그때 도도는 군대에 있어서 채식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채식을 시작하게 된 일상을 궁금해했다. 도도가 어렵고도 새로운 삶을 선택한 나를 지지해 줬다는 걸 알고 있다.

도도는 우울, 외로움, 허무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어땠냐는 말에 제일 처음 한 대답도 "외로웠어"였다.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오래 지내 왔다고 했다. 도도에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도도가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도도는 조언도 충고도 없이 내 눈을 마주 보거나 어깨를 감싸고 안아주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떤 날에 나는 메모장에 썼다. 도도가 내게 잘 살 거야, 잘 살아야 된다고 말해주어서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책임이 내게 있다.

도도는 언제나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사람. 언젠가 너도 내 곁을 떠날 거 아니냐고 방패막을 가장한 뾰족한 창을 들이밀었을 때 창 옆으로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와 창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일상에서 모멸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날에 힘들다고 연락을 하면 도도는 답했다.

"오늘 밤에 집에 돌아오면 많이 이야기 나누자."

많이 이야기 나누자는 말은 당장 눈앞에 놓인 힘든 순간을 한걸음 건너가게 해주었다. 내가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회의적인 감정들을 더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지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영화 내내 마시로의 모습에 도도를 겹쳐 봤다. 마시로가 죽으면서 나나미를 떠난 것처럼, 도도와 나도 7년의 연애를 끝내고 친구가 되었다. 도도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 시절이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연애를 끝내던 날, 도도에게 나는 말했다.

"네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참 많았어. 고마워."

도도는 내게 말했다.

"나는 너를 만나기 전엔 단 한번도 나를 멋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어. 네가 나를 멋있는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믿어줬기 때문에 그걸 처음으로 믿게 됐어."

나나미가 마시로를 알게 되면서 행복과 편안함을 알게 된 것처럼 이완된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도도를 통해서 알았다. 편안함은 내게 가장 좋은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 불편한 걸 견디는 걸 강요하는 사회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곁에 있어줄 거라고 믿게 해준 도도에게 건강과 하고 싶은 일을 해낼 용기와 환경이 주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립반윙클(마시로)'의 '신부(나나미)'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내쳐지고,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폭력을 겪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혼자서 울거나 힘들어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울렁거린다. 더 이상 길에서, 방에서, 어딘가에서 고립된 채 쓰러지는지도 모르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없으면 좋겠다. 이 마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세상을 향해서 했던 두 번째 기도다.

* 다음 필자는 조준호 작가입니다. 나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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