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충성이 부동산으로 돌아왔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1910년 9월 29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일진회 회원은 총 14만 725명이었다. |
ⓒ 국립중앙도서관 |
외교권을 넘기는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의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찬성한 정미칠적, 국권을 넘기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한 경술국적은 임금과 조정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을 도왔다.
정미칠적의 일원인 송병준은 그런 방식 외에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으로도 일본을 도왔다. 그가 라이벌이자 협력자인 이용구와 함께 운영한 일진회는 일본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산시키는 조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66년부터 1978년까지 펴낸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제1권에 인용된 1910년 9월 29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일진회 회원은 총 14만 725명이었다. 구한말의 극우파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일본이 후원하고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애당초 불가능했을 일이다.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서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한 데 비해, 일진회는 분위기나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친일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주로 전자에 치우쳐 있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후자도 꽤 요긴했다. 송병준은 두 가지를 다 소화해 낸 친일파였다.
송병준이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태어난 해는 철종 임금 때인 1858년 8월 20일이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 12월에 발행한 <조선귀족열전> 송병준 편은 그를 우암 송시열의 후예로 소개했다. 하지만 구한말 정치평론가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매천야록>은 족보를 조작한 함경도인들을 거론하면서 "송병준도 은진 송씨에 붙어 송시열의 후예 행세를 했는데, 여러 송씨들이 도리어 따라붙었다"고 알려준다. 송시열의 가짜 후예인 송병준에게 진짜 후예들이 도리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송병준이 힘이 강해졌을 때의 일이다.
그가 정말로 송시열의 후예였다면, 유년 시절부터 남의 집에 얹혀산 일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1권에 수록된 강창일 배재대 교수의 기고문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는 장진군 기생과 향리 사이에서 서얼로 태어난 그가 적모한테 구박을 받다가 여덟 살 때 쫓겨난 일을 언급한다. 그런 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머슴으로 데리고 살았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다."
▲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가운데 순종을 기준으로 왼쪽에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고 오른쪽으로 이재각, 민병석, 이재구,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다. 뒤는 오른편이 이병무, 왼편이 윤덕영이다. |
ⓒ 위키미디어 공용 |
열네 살 나이에 작은 고을 사또인 종6품 현감보다 높은 관직을 받았다. 적통이냐 서얼이냐가 중요했던 시절에 지방 향리의 서얼로 태어나 그 나이에 그런 지위에 오른 데는 민태호와의 인연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렇게 출세한 송병준이 훗날 자신이 송시열의 후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민씨 가문과의 만남은 훨씬 막강한 후원자와의 만남을 매개하는 기능을 했다. 민씨 가문의 후원으로 10대 중반에 그만한 지위에 도달한 것은 일본의 압력이 본격화된 1870년대 중반에 그가 일본과 만나는 발판이 됐다.
1875년에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위해 강화도에서 군사 도발을 일으켰다. 그런 뒤 이를 빌미로 1876년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강요했다. 이때 조선 측 수행원단에 포함된 인물이 18세 된 송병준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송병준 편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오는 일본 특명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 일행을 환영하는 반접 수행원을 맡았"다고 설명한다. 민씨 가문의 후원이 아니었으면 14세에 종5품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18세에 일본 사신단을 동반하고 접대하는 수행원을 맡지도 못했을 것이다.
송병준은 그 기회를 빌려 일본과의 연줄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를 또 다른 목적으로도 활용했다. 강화도조약 체결이라는 대일 굴욕외교를 돈 버는 기회로도 이용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통해 친일 재산을 축적하기 전부터 그런 식의 돈벌이에 눈을 떴다. <친일인명사전>은 송병준이 일본 사신단을 환영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 직후에 "이후 일본의 대표적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와 함께 부산에 본인 명의로 상관을 개설했다"라고 설명한다.
밀고 들어오는 일본의 힘에 편승해 돈을 버는 방식은 그 뒤에도 나타났다. 1895년에 개성 인삼을 대량 밀매해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한 뒤에 일본군 통역이 되어 돌아왔다. 그 뒤 그는 군납 상인이 되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 송병준 |
ⓒ 위키미디어 공용 |
그런데도 일진회라는 대중 조직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일본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파트너 이용구가 동학 출신들을 일진회에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송병준이 일진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군부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병준 자신이 대중적 기반을 갖고 대중 조직을 운영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에 동학 출신들이 대거 탈퇴한 뒤에도 일진회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일진회 회원을 14만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독자 기반도 없이 대중 조직을 이끌다 보니, 그는 일본에 더욱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를 극단적인 친일의 길로 몰고 갔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8권에 인용된 역사학자 임종국의 <친일논설선집>에 따르면,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늑약 시기에 송병준은 일반적인 친일파보다 한술 더 뜨는 주장을 했다.
임종국이 1987년에 펴낸 이 책은 송병준이 "조선국의 내치·외교를 일본 정부에 위임하여 내치의 쇄신과 외교의 신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제안을 일본에 했다고 말한다. 외교권뿐 아니라 내치권까지 갖고 가라고 선심을 썼던 것이다. 그 뒤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남보다 한술 더 뜨는 모습은 1910년 국권침탈 직전에도 나타났다. 라이벌 이용구가 한일 연방론을 내세울 때, 그는 아예 한일 통합론을 제시했다. 연방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를 만들라고 제안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붕괴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됐으니 결국 송병준의 희망대로 된 셈이다. 송병준이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송병준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는 낯이 두꺼웠기 때문이다. 자기 집이 공격받을 정도로 대중의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도 친일 대중운동에 나선 것에서도 그의 얼굴이 두꺼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특성은 히로히토의 아버지인 요시히토(다이쇼)의 즉위식에 참석한 뒤에 발표한 1915년 11월 20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도 나타난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이 기사에 따르면, 이 해에 57세였던 송병준은 일왕의 외모를 칭찬하는 발언까지 했다. "친히 용안의 화려하심을 배찰"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왕 얼굴의 화려함을 공손하게 살피고 왔다고 언론을 통해 말했던 것이다.
이런 송병준을 일본은 특별히 아꼈다. <친일인명사전>은 송병준이 사망한 해인 1925년 당시 홋카이도에 그의 땅이 560만 평 이상 있었다고 알려준다. 일본에 대한 충성이 부동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죽은 직후에 일본 정부는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했고, '용안이 화려하신' 요시히토 일왕은 포도주 12병을 하사했다.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됐다. 구한말판 극우세력이 일본의 한국 병합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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