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앞에서 좌절할 때 베토벤을 생각합니다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8. 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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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빈 베토벤 생가에 가다

[김찬호 기자]

쾰른에서 오늘도 늦어진 기차를 타고 잠시 다녀온 곳은, 인근의 도시 본(Bonn)이었습니다. 본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본이 서독의 수도였기 때문이죠. 무언가 그 시절의 흔적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본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서독의 수도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본은 작은 도시에 불과합니다. 본이 서독의 수도였던 시절에도, 본은 언젠가 베를린으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 수도'였습니다. 그 상징성을 위해 일부러 작은 도시를 수도로 선택했다고도 들었습니다.

결국 서독 정부와 관련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독일 대통령의 별장 정도가 남아 있었죠. '독일 연방 공화국 역사의 집'이라는 박물관이 있었지만, 패전 이후 독일의 역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 집
ⓒ Widerstand
오히려 본에서 만난 의외의 인물은 베토벤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태어나 어린 시절 자란 곳이 본이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본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관광 상품도 주로 베토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진 인물이죠. 18-19세기 서양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음악의 신이라느니, 악성(樂聖)이라느니 하는 위대한 칭호도 항상 따라붙는 음악가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생가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물론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생가의 전시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역시 한 시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생활인이라는 점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베토벤 생가
ⓒ Widerstand
베토벤은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있던 작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귀족에게 고용되어 그를 위해서만 작곡과 연주를 하는 음악가가 중세적 형태의 음악가라면, 완전히 자유롭게 곡을 만들고 판매하는 음악가는 근대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겠죠. 
베토벤은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귀족의 후원을 받기도 했지만, 혁명 사상에 동조하며 세습 신분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기도 했습니다. 충분한 후원을 받지 못할 때에는, 악보의 저작권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했죠.

특히 악보의 저작권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당대에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베토벤은 유럽 각지에 위치한 출판사와 악보 판권 문제로 수 차례 협상과 분쟁을 이어가야 했죠.

당시 귀족이나 출판사와 나누었던 편지가 그의 생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골몰하는 베토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새로웠습니다. 지금이야 초상화의 한 모습으로만 박제된 역사 속의 인물이지만, 그 역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테죠.

특히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면서, 그는 유명한 작곡가로 성장하기 전부터 가정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편지
ⓒ Widerstand
베토벤이 연주했던 악기도 여럿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그가 생전에 직접 연주한 피아노가 생가 내 전시관의 핵심이 되는 전시품이었죠. 
작곡가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야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베토벤은 당대부터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이니, 그가 사용했던 악기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도 결코 특이한 일은 아니죠. 다만 인상깊었던 것은, 그의 이름이 적힌 피아노가 만들어진 경위입니다.

베토벤이 살았던 시대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피아노는 아직 개량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죠. 이 과정에서 베토벤을 비롯한 당대의 작곡가들과 악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밀접하게 협업하며 움직였습니다.

작곡가는 더 다양하고 풍부한 음을 사용하기 위해 발전된 악기를 필요로 했죠. 더 낮은 음도, 더 높은 음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반악기를 원했습니다. 다양한 음이 필요한 곡을 작곡하면, 그 곡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가 만들어져야 했죠. 한편으로는 그렇게 만들어진 발전된 악기가, 작곡가가 더 뛰어난 음악을 작곡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에 새겨진 베토벤의 이름
ⓒ Widerstand
제가 우연히 만난 베토벤 생가를 인상 깊게 둘러보았던 것은, 수백년 전 그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예술가들도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분투합니다. 저작권을 두고 출판사와 씨름하기도 하죠. 
더 뛰어난 예술을 만들기 위해, 발전된 기술과 밀접하게 협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악기를 만드는 기술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요. 현대의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학자와 협업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니까요.
현대 예술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을, 200년 전 고전음악을 완성한 이 위대한 작곡가에게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현실의 벽과 싸우며, 그 벽을 넘어보고자 시도하는 수많은 예술가의 모습이 겹칩니다. 현실에서도, 예술의 세계에서도 말이죠.
 
 베토벤의 보청기
ⓒ Widerstand
전시의 마지막은 베토벤이 사용했던 보청기의 모습이었습니다. 베토벤이 처음 청력 이상을 느꼈을 때, 친구에게 쓴 편지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함께 적힌 편지였습니다. 
이제 막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에게, 평생을 음악에 걸고 살았던 그에게 청력의 이상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을까요. 그가 살아온 흔적을 둘러보고 나니, 그도 그런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합니다.
여러 치료 시도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베토벤은 청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곡을 여럿 남겼습니다. 오히려 더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음악을 내보일 수 있게 해 준 용기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본 시내 광장의 베토벤 동상
ⓒ Widerstand
오래 전에 종영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한국을 떠나는 지휘자 강건우는 청력을 잃어가는 바이올리니스트 두루미에게 자신의 반지를 건넵니다. 한 끼 먹을 돈밖에 없던 유학 시절, 밥을 굶고 산 반지라고 말하면서요. 원래 지휘자는 반지를 끼면 안 되지만, 더 강해지기 위해 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그가 반지를 산 곳이 바로 베토벤 생가 근처였습니다. 저도 얇은 지갑을 털어 반지 하나를 샀습니다. 이 긴 여행에서 기념품 같은 것을 사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예외로 삼기로 했습니다.

다만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던 베토벤 역시 두려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생계를 위해, 또 예술을 위해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려 부단히 애쓰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생활인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 벽 앞에 좌절할 법할 순간에도, 그는 끝내 용기를 냈던 사람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해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순간에, 여전히 악보 앞에 앉았습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반지를 건넨 지휘자 강건우는 말합니다. "이제는 네가 강해질 때"라고요. 이 반지를 만질 때마다,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벽 앞에 좌절할 때, 생가에서 만난 베토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도 어쩐지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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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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