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앞에서 좌절할 때 베토벤을 생각합니다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쾰른에서 오늘도 늦어진 기차를 타고 잠시 다녀온 곳은, 인근의 도시 본(Bonn)이었습니다. 본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본이 서독의 수도였기 때문이죠. 무언가 그 시절의 흔적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본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서독의 수도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본은 작은 도시에 불과합니다. 본이 서독의 수도였던 시절에도, 본은 언젠가 베를린으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 수도'였습니다. 그 상징성을 위해 일부러 작은 도시를 수도로 선택했다고도 들었습니다.
▲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 집 |
ⓒ Widerstand |
베토벤은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진 인물이죠. 18-19세기 서양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음악의 신이라느니, 악성(樂聖)이라느니 하는 위대한 칭호도 항상 따라붙는 음악가입니다.
▲ 베토벤 생가 |
ⓒ Widerstand |
베토벤은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귀족의 후원을 받기도 했지만, 혁명 사상에 동조하며 세습 신분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기도 했습니다. 충분한 후원을 받지 못할 때에는, 악보의 저작권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했죠.
특히 악보의 저작권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당대에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베토벤은 유럽 각지에 위치한 출판사와 악보 판권 문제로 수 차례 협상과 분쟁을 이어가야 했죠.
당시 귀족이나 출판사와 나누었던 편지가 그의 생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골몰하는 베토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새로웠습니다. 지금이야 초상화의 한 모습으로만 박제된 역사 속의 인물이지만, 그 역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테죠.
▲ 베토벤의 편지 |
ⓒ Widerstand |
작곡가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야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베토벤은 당대부터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이니, 그가 사용했던 악기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도 결코 특이한 일은 아니죠. 다만 인상깊었던 것은, 그의 이름이 적힌 피아노가 만들어진 경위입니다.
베토벤이 살았던 시대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피아노는 아직 개량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죠. 이 과정에서 베토벤을 비롯한 당대의 작곡가들과 악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밀접하게 협업하며 움직였습니다.
▲ 피아노에 새겨진 베토벤의 이름 |
ⓒ Widerstand |
더 뛰어난 예술을 만들기 위해, 발전된 기술과 밀접하게 협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악기를 만드는 기술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요. 현대의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학자와 협업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니까요.
▲ 베토벤의 보청기 |
ⓒ Widerstand |
이제 막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에게, 평생을 음악에 걸고 살았던 그에게 청력의 이상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을까요. 그가 살아온 흔적을 둘러보고 나니, 그도 그런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합니다.
▲ 본 시내 광장의 베토벤 동상 |
ⓒ Widerstand |
그가 반지를 산 곳이 바로 베토벤 생가 근처였습니다. 저도 얇은 지갑을 털어 반지 하나를 샀습니다. 이 긴 여행에서 기념품 같은 것을 사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예외로 삼기로 했습니다.
다만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던 베토벤 역시 두려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생계를 위해, 또 예술을 위해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려 부단히 애쓰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생활인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 벽 앞에 좌절할 법할 순간에도, 그는 끝내 용기를 냈던 사람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해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순간에, 여전히 악보 앞에 앉았습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반지를 건넨 지휘자 강건우는 말합니다. "이제는 네가 강해질 때"라고요. 이 반지를 만질 때마다,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벽 앞에 좌절할 때, 생가에서 만난 베토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도 어쩐지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사장교체 전에 수신료 분리징수 먼저... KBS 없애려는 의도"
- 홍준표 "항일독립전쟁 영웅까지 퇴출, 너무 오버... 이건 아니다"
- 군대 방송도 틀어주던 '이등병의 편지' 왜 금지곡이 됐나
- 호캉스-파자마 파티, 이 남자들이 노는 법
- FC바르셀로나 팬이 순식간에 레알 마드리드로 갈아탄 사정
- "젓가락도 안 준 잼버리, 엉망... 한국인들이 미안하다 사과해 당황"
- 죽어도 죽지 않는 섹스 심벌의 초상,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다
- 중국, 일 연립여당 대표 방중 '퇴짜'... "적절한 시기 아냐"
- 5년전엔 "독립군 계승" 자랑하던 국방부, 정부 바뀌자 선 긋기?
- 국방부 "육사 독립군 흉상 이전, 국군 뿌리서 배제는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