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크한 공포 영화 ‘잠’ 이끌어 가는 정유미의 섬뜩한 얼굴
“누가 들어왔어.”
잠꼬대처럼 낮게 깔린 남편의 한 마디에 모든 게 달라졌다.
만삭의 임산부로 식품회사에 다니는 수진은 낡았지만 아늑한 아파트에서 단역배우 현수와 살아간다. 거실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소박한 가훈을 걸었고, 하나뿐인 방에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침대를 놓았다. 흠잡을 데 없는 신혼부부의 일상은 남편이 기묘한 잠버릇을 보이면서 서서히 갈라져 간다. 잠만 들면 딴 사람처럼 변해버리는 남편이 걱정돼 아내는 잠을 잘 수 없게 됐다. 자면서 생고기와 날생선을 꺼내 먹고, 기르던 개를 냉동고에 넣는 남편은 스스로가 두려워지고, 아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부부는 서로를 무서워하게 된다.
공포나 괴담의 단골 소재인 몽유병과 수면장애를 이 영화는 영리하게 측면에서 바라본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변할까. 차라리 좀비나 악귀라면 도망치거나 무찌르기라도 할 텐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공포 유발자라면 어떻게 지켜주고 해결해야 할까.
영화 '잠'(감독 유재선)은 지난 5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면서 처음 공개됐다. “고군분투하는 젊은 커플의 아이를 낳기 전과 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영화”(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 에이바카헨), “공포ㆍ환상ㆍ코믹과 같은 장르를 넘나들며 부부와 가족, 믿음과 전통, 의식과 무의식, 과학과 의학에 대한 성찰의 토대를 마련한다”(무비라마)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이런 평가는 잠든 남편이 다치지 않도록 양손에 오븐 장갑을 끼워 주는 귀여운 신혼부부부터 가늘고 긴 손가락 끝으로 식칼을 두드리며 밤새 부엌을 지킨 초보 엄마의 예민함까지 오간 배우 정유미의 힘이기도 했다. 22일 서울 안국동에서 만났다.
Q : 호러ㆍ미스터리ㆍ스릴러ㆍ코미디… 여러 장르로 볼 수 있는 영화라는 평가는 그만큼 배우가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기 때문 아닌가. 본인이 꼽는 이 영화의 장르는.
“그런 반응이 신기하고 다행스럽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러브 스토리’라고 말하겠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 감독님이 이렇게 설명해 주시는 것에 반했다. 한 부부가 자기들의 방식대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 꽁냥꽁냥 하는 것만이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 그 편견을 깨주셨다.”
Q : 갈수록 불안해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내가 택한 시나리오이고 캐릭터이니 그 안에서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가면 오히려 방해될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런 표현은 어때요, 저런 건 어때요?' 하면 깔끔한 시나리오에 군더더기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슴 같은 긴 목에 여리여리한 외모의 이 배우는 이외로 강단 있는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다. 청각장애아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인권센터 활동가(‘도가니’)부터 '부산행' 열차 안 좀비 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만삭의 임산부, 장난감 칼 휘둘러 학생들을 지키는 ‘보건교사 안은영’, 그리고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은 ‘82년생 김지영’까지다. ‘옥자’(감독 봉준호)의 연출부 출신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잠’에서도 광기 어린 문제 해결력으로 아슬아슬한 공포감을 선사한다. 그는 “그때그때 나한테 오는 것 중 제일 재미있는 것, 끌리는 것을 택한 결과다. 선택의 최우선은 재미, ‘하하호호’ 하는 재미가 아니라 완성도나 연기에서 추구하는 재미”라고 덧붙였다. 봉준호 감독은 ‘잠’에 대해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영화이자 스마트한 데뷔 영화”라며 특히 배우들에 대해서는 “미친 연기”라고 호평했다.
Q :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봉준호 감독의 소개도 있었다던데.
“유명한 분들 전화번호는 이름을 따로 저장하지 않는다. 봉 감독님은 ‘ㅂ’으로 해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기에 ‘ㅂ’이 뜨더라. ‘드디어 내게도 이분의 시나리오가?’ 잠시 설렜는데, 소개 전화였다(웃음). 시나리오가 후루룩 읽혔다. 간결한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어서 유 감독님이 궁금해졌다. 봉 감독님 소개라는 선입관을 지우고 나만의 생각으로 뵙고자 했다.“
Q : 연상호 감독의 ‘염력’ 때 밝은 얼굴로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연기 장면이 1038만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로 재조명받고 있다.
”원조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이라더라. 그래서 ‘더 미쳤어야 했나’ 생각했다. 이번 영화에 대해서도 ‘광기 어린 사투’라고들 표현해 주시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사투의 한 부분일 뿐 광기에 대해서라면 난 아직 갈 길이 멀다, 목마르다(웃음).”
겸손한 말과 달리 부석한 얼굴과 빨개진 눈으로 불면과 불안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은 귀신보다 섬뜩하다. 잠이라는 일상적 소재에서 출발, 한정된 아파트 공간 속에서 오븐장갑ㆍ곰솥ㆍ드릴 같은 생활소품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영화는 칸에 이어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 등에 잇따라 초대됐다. 다음 달 6일 개봉. 15세 관람가.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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