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오펜하이머의 진심 "1942년으로 돌아간다면 원자폭탄을…"(下)

이종길 2023. 8. 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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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에 관심 있었지만 무지했던 히틀러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미묘한 대립
버클리·칼텍에서도 유대인 편견서 자유롭지 못해
1964년 제네바 강의서 강한 애국심 보여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에 이어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으로, 나치 독일에서 무장과 전시생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원자폭탄 제작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언제나 내게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물어보곤 했다. 그것은 그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핵물리학의 혁명적인 본질부터 파악할 수 없었다. 히틀러와 내가 참석한 회의는 2200회 정도 있었다. 그중에서 핵분열 문제는 단 한 번 나왔고, 그것도 아주 간단히 언급됐다. 히틀러는 연구 전망을 물었으나 이 문제에서 별로 얻는 것이 없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교수가 성공적인 핵분열은 확실히 통제될 수 있는 것인지, 연쇄 반응으로 그대로 계속되는지에 대한 나의 물음에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아서다. 히틀러는 그의 통치 아래 있는 땅이 불타는 별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다지 즐겁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때로 과학자들이 지구에 불을 지를지 모른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자기는 그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버클리의 프랑스 문학 교수이자 번역가인 하콘 슈발리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키가 큰데 소심하면서 열정적이었다. 걷는 모습은 이상했다. 터벅터벅 걸으며 사지를 많이 흔들었다. 머리는 언제나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고.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올라가 있었다. 가장 유별난 부위는 머리였다. 검은 곱슬머리인데 숱이 적었다. 코는 잘생기고 뾰족했다. 눈은 놀랍게도 푸른색이었다. 신비한 깊이와 강렬함이 있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나타나 붙임성 있게 보였다. 오펜하이머는 어린 아인슈타인 같아 보였다. 성숙한 합창단 소년 같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1936년 가을 진 태틀록을 처음 만났다. 둘은 적어도 두 번 결혼할 뻔했다. 태틀록은 밝고 정열적이었으나 동정심이 많고 자주 우울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폭풍의 바다였다. 오펜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녀는 내게 자기가 공산당원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가입하고, 탈퇴하고, 다시 가입했다. 공산주의가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 두 사람은 좌익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나는 새로운 교우 관계를 좋아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의 반프랑코 측 주장과 캘리포니아의 계절노동자(멕시코인)들을 좋아했다. 공산주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카를 마르크스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그들의 어조가 자기 취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듯했다."

*오펜하이머는 1939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갈색 눈의 아내 키티를 처음 만났다. 태틀록은 실연의 상처를 입고 반발로 젊은 영국 의사 스튜어트 해리슨 박사와 결혼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 조 달레와 결혼했다. 스페인에서 싸우다 죽은 남자다. 그는 공산당 간부였다. 1~2년의 짧은 결혼 생활 동안 키티도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전남편을 극진히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정치적 활동도 중단한 상태였다. 공산주의가 한때 생각한 이상적 사상과 거리가 멀다는데 실망과 경멸을 느끼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1942년 10월 버클리에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을 처음 만났다. 버클리 총장이 초대한 오찬에서 만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의 집중적인 중앙연구체제 방식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폭탄설계 작업이 즉시 시작돼 적어도 미국이 한 분야에서라도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를 맡을 적임자를 고르는 과정에선 지도력에 가장 주목했다. 그래야 아무리 험한 파도를 만나도 계속 항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연구소 장소를 물색하는 임무를 존 더들리 소령에게 부여했다. 약 265명을 수용하고, 국경에서 적어도 200마일 이상 떨어져 있으며, 미시시피 서쪽으로 기존 시설이 약간 있는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면 적당할 거라고 지시했다. 더들리 소령은 비행기, 기차, 군용 지프 그리고 말을 타고 미국 남서부를 돌아다녔다. 처음 발견한 이상적 장소는 유타주 오크였다. 그러나 이곳을 차지하려면 약 서른 가구를 이주시키고, 넓은 땅의 농사를 중단시켜야 했다. 두 번째로 추천한 곳은 뉴멕시코주의 예메즈 스프링스였다. 샌타페이로부터 북서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예메즈 산 서편 기슭에 있는 깊은 계곡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이곳을 가보기도 전에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브스 장군은 "이곳은 안 되겠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계곡을 올라가면 넓은 지역과 학교가 있는데 그곳이 쓸 만할 겁니다"라고 조언했다. 로스앨러모스라는 학교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직접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곳이야!"라고 외쳤다.

*과학자들은 트리니티 실험 전 폭발 위력을 두고 내기했다. 여러 가지 예측되는 위력을 써놓고는 각자 1달러씩 내고 한 가지씩을 골랐다. 텔러는 45㏏, 베테는 8㏏, 키샤코프스키는 1400t, 오펜하이머는 300t으로 예측했다. 램지는 냉소적으로 0t을 선택했다. 방사 화학적 분석에서 위력은 18.6㏏으로 판명됐다. 이시도어 라비가 이겼다.

*한 개의 폭탄에는 폭약 덩어리 아흔여섯 개가 필요했다.

*베이스캠프에서 트리니티 실험을 지켜본 랍비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는 이른 새벽에 매우 긴장돼 엎드려 있었다. 동쪽에서 몇 줄기 황금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옆 사람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10초는 내가 경험한 그것 가운데 가장 길었다. 갑자기 거대한 섬광이 나타났다. 내가 지금까지 본, 아니 누구라도 지금까지 본 빛 중에서 가장 밝았다. 그것은 터졌고, 갑자기 덤벼들었고, 나를 뚫고 지나갔다. 온몸으로 체감하는 광경이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폭발이 끝나고, 우리는 폭탄이 있던 곳을 쳐다봤다. 거대한 화구가 있었다. 점점 커지며 구르기 시작하더니 공중으로 올라갔다. 순간 노란 섬광은 주홍색과 녹색으로 변했다. 위협적이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로버트 서버는 트리니티 실험 당시 자칫 시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을 강행해 화구의 초기 단계를 볼 수 있었다. "폭발하는 순간 나는 직접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노란 불빛이 보였다. 순식간에 거대한 흰색 섬광으로 변했다. 너무 강렬한 나머지 나는 완전히 눈이 보이지 않았다. (…) 1초 뒤 나는 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의 크기와 장엄함에 완전히 숨이 막혀버렸다."

*에밀리오 세그레는 트리니티 실험 당시 세상의 끝을 상상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압도적인 밝은 빛이었다. (…) 나는 새로운 광경에 소스라쳐 놀랐다. 아주 검은 안경을 썼지만, 하늘이 믿을 수 없는 밝은 빛으로 번쩍거리는 걸 봤다. (…) 나는 한순간 폭발이 대기에 불을 붙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지구가 끝장이 난 줄 알았다."

*엔리코 페르미는 트리니티 실험 당시 폭탄의 위력을 개략적으로 가늠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폭발하고 40초쯤 지나 폭풍이 내가 있는 곳에 불어닥쳤다. 나는 1.8m 높이에서 조그만 종이쪽지들을 떨어뜨려 폭풍이 도착하기 전후의 날아가는 거리를 측정했다. 당시 바람이 불고 있지 않았으므로 폭풍에 의해 종이가 날아가는 거리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종이쪽지들은 약 2.5m 거리에 떨어졌다. 나는 폭탄의 위력이 TNT 1만 톤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케네스 베인브리지는 트리니티 실험이 끝난 뒤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성공적인 폭발을 축하했다. 훗날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로버트(오펜하이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다'라고. 그는 오랜 시간 뒤 내 딸에게 그것이 실험 뒤 받은 최고의 인사였다고 말했다."

*라비는 트리니티 실험을 마친 뒤 피곤함을 느꼈지만 이내 걱정에 휩싸였다. "우리는 당연히 성공적인 실험 결과에 무척 기뻐했다. 지금도 거대한 불덩어리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굴러갔고, 시간이 흐르자 구름과 같이 퍼져나갔다. (…) 그러고는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우리는 처음 몇 분 동안 서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하나같이 곧 싸늘함을 느꼈다. 새벽 추위가 아니었다. 케임브리지에 있는 내 목조 가옥 그리고 뉴욕에 있는 내 실험실 그리고 그 주위에 사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생긴 감정이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이해했던 자연의 힘에 압도돼버렸다."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을 떠올리며 힌두 경전을 인용했다. "우리는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피호에서 걸어 나왔다. 매우 엄숙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세계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명은 웃었다. 몇 명은 울었고. 사람들 대부분은 조용했다. 힌두 경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비슈누가 왕자에게 자기 의무를 다하라고 설득한 그것이다. 왕자에게 팔이 여러 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이제 나는 세계를 파괴하는 죽음이 됐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어떤 방법으로든 비슷하게 생각했다고 믿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전후 한 강연에서 청중에게 트리니티 실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뉴멕시코의 새벽에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우리는 알프레드 노벨과 그의 희망, 즉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을 종식할 거라는 헛된 희망을 생각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도 생각했다. 인간이 악을 인정하고, 오래전부터 악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인간의 새로운 힘에 대한 깊은 죄의식을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것(악) 자체가 인간의 생활에서 매우 오래된 것이고, 모든 우리의 수단이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더 잘 알고 있었다."

*트리니티 실험 뒤 타워, 2만 달러짜리 기중기, 오두막집, 강철 기둥 등은 모두 기화해 날아갔다. 다리 부분의 콘크리트 철근만 이리저리 휘어진 채 조금 남아있었다. 아스팔트 포장 도로는 모래가 녹으면서 엉겨 붙어 녹색의 옥처럼 반짝거렸다.

*오펜하이머는 분명 사회적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물리학자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적었다.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익숙하지 않았던 로스앨러모스 물리학자들이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좋지 않은 모양으로 끼어들게 됐다는 의미였다.

*오펜하이머는 1949년 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동생과 몇몇 제자가 2차 대전 당시 방사선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심취해 반미 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오펜하이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렌빌 클라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안보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사상의 자유를 침범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오펜하이머는 1932년 1월 칼텍에서 아인슈타인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3년 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방문 교수로 초청받아 재회했다. 그는 당시 소감을 이렇게 썼다. "프린스턴은 정신병원이나 마찬가지야. 유명한 이름값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황량하기 그지없어.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멍청이야. (…) 내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겠니? 한참이나 대화하고 손을 흔든 다음에야 거부 의사를 밝히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어." 거부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연구 스타일, 양자물리학에 대한 견해, 현대 물리학의 당면 과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서였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물리학의 엄청난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물리학 세계의 이해를 돕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1939년 물리학계의 고민을 두고 아인슈타인과 가까운 관계가 됐다. 최대 관심사는 여전히 양자물리학과 양자장이론이었으나 칼텍 천문학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무거운 별들이 핵에너지를 소진하고 중력을 못 이겨 붕괴하는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제자 조지 볼코프, 하틀랜드 신더와 함께한 연구에선 상대성이론으로 '블랙홀'을 예측해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이용해 특이점을 해석할 수는 없다고 확신해 이를 근거로 한 블랙홀 설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블랙홀의 물리학적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도 나이가 든 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홀 연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장본인은 그들이다.

*아인슈타인이 고등연구소 은퇴를 앞두자 누가 그 공백을 메울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볼프강 파울리와 오펜하이머가 물망에 올랐다. 아인슈타인과 헤르만 바일은 교수들에게 파울리를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파울리는 배타원리, 전자스핀 분석과 같이 물리학의 근본적인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그만한 공헌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가 애치슨-릴리엔솔 보고서 수립과 미국·소련의 군비 경쟁을 막기 위해 쏟은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정부 권력층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47년 가을 오펜하이머가 고등연구소 소장 겸 물리학 교수가 되면서 그와 아인슈타인은 동료 관계가 됐다.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이 사망하자, 오펜하이머는 며칠 뒤 프린스턴 대학 신문에 추모글을 실었다. "그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특히 1905년부터 1925년까지 물리학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물 속에서 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물리학 세계를 가능하게 했다. (…) 그가 만든 특수 상대성이론을 통해 우리는 우주와 시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이라는 과학 세계를 통틀어 가장 원대한 단일 이론을 창조했고, 중력의 보편성과 우주를 향한 새로운 시각도 열었다. 다른 대부분의 과학적 발견과 달리,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여전히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이듬해 1월 '리뷰스 오브 모던 피직스'에도 아인슈타인을 향한 찬사를 보냈다. "그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원자의 특징을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통합의 장을 만들고 싶어 했던 거다. 상대성이론을 통해 전자기 현상에 관한 어떤 문제에도 답이 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그는 질량과 전기의 부분적 응집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애썼으며, 양자이론을 통해 설명되는 부분을 원자 세계에 적용하고자 했다. 죽는 날까지 이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조금 달랐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물리학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으며, 불필요한 통합 프로그램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깎아내렸다. 고등연구소가 25년간 연구비를 댔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아인슈타인을 깊이 존경했다. 그것은 1965년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당연히 존경하지요. 저는 젊은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지요."

*아인슈타인은 뿌리를 이룰 공동체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와 정반대 성향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몇 번이나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혔다. 구스타프 마이어와 요스트 빈텔러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와 칼텍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의식했다. 저명한 핵물리학자 찰스 로릿센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학교 측에 두 번이나 라비를 채용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대답이 없군요. 왜 그럴까요? 예산이 부족해서요? 아니면 유대인 교수를 또 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가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유대인 사회 구성원이길 거부했던 오펜하이머에게는 또 다른 공동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1930년대에 정치 활동에 매달렸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벗어나고자 애국심에 매달렸다. 수많은 부침 중에서도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0년대 버클리 시절 미국의 물리학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고자 했던 사명감은 이렇게 설명이 된다.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그로브스 장군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펜하이머 박사가 저의 고문으로서 제 필요에 응한 것이지, (…) 그가 제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준 적은 없습니다. (…) 과학적 결정에 대한 책임은 저희(니콜라스 장군과 자신)에게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라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펜하이머 박사의 직위 박탈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결코 시행돼선 안 될 일이었습니다. (…) 그는 그저 조언자였습니다. 당신이 문의하기 싫으면 그냥 안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 따라서 오펜하이머 박사에게 이런 대접을 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 오펜하이머 덕분에 우리는 수소폭탄을 포함한 일련의 무기들을 소유하게 됐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인어라도 대령할까요?"

*오펜하이머는 1964년 제네바 강의에서 사회자와 대담하며 강한 애국심을 드러냈다. "만약 지금의 세계를 내다보았더라도 감히 원자폭탄을 만드는 실험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의 역할은, 뭐라고 할까, 모두의 노력을 하나로 모으는 일종의 사회자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어쨌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질문해 보고 싶군요. 지난 20년간의 세월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1942년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원자폭탄을 만드시겠습니까?" "저는 이미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히로시마를 안다고 하더라도요?" "네."

참고 자료 : 실번 S. 위버 지음·김영배 옮김·발행처 시대의창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2013)', 카이 버드 & 마틴 셔윈 지음·최형섭 옮김·발행처 사이언스 북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10)',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정철 & 강규형 옮김·발행처 에코리브르 '냉전의 역사(2010)', 리처드 로즈 지음·문신행 옮김·발행처 사이언스북스 '원자폭탄 만들기 1·2(2003)'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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