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비극" 이 말이 전두환 입에서 나왔다
[황광우 작가]
▲ 전두환 회고록 |
ⓒ 권우성 |
어쩌다 전두환의 <회고록>을 읽게 되었다. 1980년 5월, 그자로 인해 나는 대학을 제적당했고, 수배를 당했다. 그자로 인해 나의 형은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죽음 직전의 고문을 당했고, 나의 장형은 지리산 깊은 곳 암자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잊고 싶다. 용서해주고 싶다. 하지만 한 사람이 품는 원한이 공적인 것이라면 그 원한은 표현되어야 한다. 수백만 명의 공적인 원한은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것이 원한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이라는 간판이 걸릴 때 우리는 아연실색했다. 총칼로 국민을 학살한 자가 청와대에 들어가더니 버젓이 패거리를 모아 당(黨)을 만들었다. 당의 간판에 감히 민주와 정의를 집어넣을 때, 우리는 넘어져 버렸다.
적반하장, 언어도단, 이율배반 등 알고 있는 모든 사자성어를 찾았지만, 사태에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하였다. 말로 다툴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를 몰아내기 위한 장기 항전 계획에 착수했다.
나는 그자에 대한 심판이 오래 전 끝난 것으로 알았다. 1987년 6월 29일, 서울 시민들이 '오늘처럼 좋은 날'이라며 커피를 공짜로 주는 날, 나는 행복했다. 살아생전 그를 권좌에서 몰아냈으니 말이다. 1995년 그의 뒷머리가 교도소로 들어갈 때, 나는 행복했다. 그날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탕수육을 사주었다.
그자는 내란죄의 수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옥문을 열고 나왔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리고 2017년 무엄하게도 회고록을 냈다. 방귀 뀐 놈이 화낸다더니,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고소했다.
▲ 전두환, 노태우 석방 기사 |
ⓒ 5.18 기념재단 |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사태는 아물지 않은 상처로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국군과 시민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던 당시의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378쪽
위 문장은 교장의 훈화가 아니다. 광주사태를 기획하고 집행한 그 수괴의 말이다. '광주사태가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비극'이라는 말이 그자의 입에서 나오다니 독자들도 순간 뇌가 마비되는 증세를 겪을 것이다.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대한민국 군인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381쪽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위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382쪽
내 눈에 뭣이 씌웠나? 군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적이 없다고? 선량한 국민에게 총구를 겨눌 일이 없다고? 뭐가 어쩐다고? 그는 총과 칼로 1천여 명이 넘은 사상자(死傷者)를 초래한 내란 수괴이다. 그런 자가 다시 살아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군인의 명예를 거론하고 있다.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충돌이 유혈사태로 번지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원인은 시위대가 무장을 하게 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 쇠파이프, 갈쿠리 등만으로 계엄군을 공격했다면 2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한 참극으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위대가 총기와 실탄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상황은 소요와 진압이라는 단계를 넘어 '교전(交戰)'의 양상을 띠며 그야말로 국지적 내전이 돼버린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399쪽
대단한 요설이다. 도청 앞의 상황을 모르는 분이 이 글을 읽으면 광주 학살이 적을 상대로 수행한 전쟁이었다고 이해하기 딱 좋게 글을 썼다. 나에게 소크라테스와 같은 정교한 변론술이 없는 게 한스럽다. 이 자의 교활함을 표현할 논리가 없으니 쉽게 말하겠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제11공수들이 '앉아 쏴' 자세로 먼저 정조준 사격을 하였거든요."
"뭐라고요. 시위대가 먼저 총을 쏘았다고요? 이거,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에요? 오전 10시부터 시민대표들이 공수부대 대대장을 만나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제발 철수해달라고 호소하였잖아요?"
"시민들은 굶주린 공수들에게 빵도 주고 우유도 주고 김밥도 주었고요. 약속된 철수 시각 12시가 넘자, 시민들은 흥분했지요. 애국가를 신호로 발사되기 시작한 집단 총격으로 도청 앞이 피바다가 되었잖아요. 오후 1시~1시 30분 집단 사살을 목격한 시민들이 이후 오후 3시 무장하기 시작했고요."
"1980년 6월 19일 광주지검이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5명이다.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에서 무차별 총기 공격을 했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인명 살상이 발생할 수 있는 총기사용을 최대한 억제했다는 군 당국의 주장에 신뢰를 갖게 하는 일이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380쪽
▲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있는 시민 |
ⓒ kbs |
비겁한 자여, 정말 책임이 없는가
10여 분만에 최소 50명이 죽었고, 500명이 총상을 입었다. 1000발 이상 사격을 가했다는 거다. 사망자나 부상자나 똑같은 총격 희생자이다. 총상 환자를 수술한 기독병원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공수들이 발사한 탄환은 국제법으로도 금지된 납탄이었다. 가증스런 학살이었다. '총기사용을 최대한 억제했다'는 이자의 혀는 사람의 혀인가, 살인마의 혀인가?
내가 알기로 장수는 전쟁의 책임을 진다. 패전한 장수는 전쟁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자결을 선택한다. 히틀러는 자결했다. 황현은 조선왕조의 몰락 앞에 아무 책임질 일이 없는 서생이었는데도 자결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의 그 어느 시간에도, 전남 광주의 그 어느 공간에도 나는 실재하지 않았다. (382쪽)
광주에 실재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비겁하다. 김일성도 1950년에서 1953년까지 38선 이남 그 어느 공간에도 실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의 책임으로부터 면제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중앙정보부장 서리와 보안사령관을 겸임했던 자여, 말해 보라.
이런 자가 북한의 남침 위협을 앞세워 민주화 운동을 짓밟았다. 남침한 자는 이 자다. 1979년 12월 12일, 휴전선을 지키던 제9사단을 빼내 서울을 남침했고, 1980년 5월 19일, 수도권을 방위하던 제11공수와 제3공수를 빼내 광주를 남침했다. 비겁한 자여, 답해 보라.
과거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는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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