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쇼헤이가 자꾸 소환하는 그 이름

장소영 2023. 8. 2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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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 묘비에서 만난 야구팬... 야구는 사람이 기억이 되는 스포츠라는 깨달음을 얻다

[장소영 기자]

오타니가 뛰어난 선수라는 건 알겠다. 마치 신이 야구를 하라고 그에게 몽땅 몰아준 것처럼, 체격에, 성격에, 천재적인 재능에, 운동선수였던 부모에, 외국인에게도 활짝 열린 MLB 환경에, 심지어 외모까지 겸비했으니.

알았다고. 인정한다. 작년에 이미 10승-10홈런으로 104년 만에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올라서며 연일 베이브 루스를 소환하더니, 금세 베이브 루스와 비교도 안 될 투타 겸업 현대 야구의 원탑으로 칭송받는 중이다.

그렇다. 비교 불가다. 출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베이브는 야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어두운 뒷골목을 전전하다 마칠 뻔 한 인생이었고, 당시 미국 프로야구는 지금과 운영 환경도, 선수 관리도 다른 시절이었다.

기일(지난 16일)도 다가오니 이참에 그를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타니 쇼헤이가 자꾸 소환하는 그 이름. 영원한 양키의 전설. 기록은 부숴도 이름은 부술 수 없는 불멸의 야구인. 어린 시절, 엄마가 안겨준 위인 전기 속 내 영웅, 베이브 루스에게로.

천상계의 야구인이자 야구하는 어른이, 베이브 루스 
 
▲ 신화가 된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 묘비 묘비 부조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영감이 되길 원하는 추모글이 인상깊다. 베이브 루스는 고아원과 어린이 병원을 자주 방문하는 등 어린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선수였다고 알려진다. 왠지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고 이른 예수와 어린 베이브가 천국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장소영
멀리서 봐도 덩치 크기로 유명했던 그를 닮은 큰 묘비가 우뚝 서 있다. 주차할 곳을 찾아 나무 그늘 아래로 이동하며 보니, 어떤 사람이 묘비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추모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시도록 기다렸다가 떠나는 걸 보고 묘비로 다가갔다.  

묘소는 관리 상태가 매우 좋았다. 연일 폭염 경보가 이어지던 중이었는데 묘소 앞 꽃 한 송이도 시들지 않았다. <레 미제라블> 소설 속 장발장이 그랬듯, 불량아였던 베이브는 그를 야구의 길로 인도해 준 마티아스 신부처럼 평생 고아원과 아동 병원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곤 했다.

묘비 부조에도 베이브 루스가 아닌 어린이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 베이브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던 예수의 말씀을 이은 것일까? 야구복을 입은 듯한 어린 소년이 예수의 곁에 있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찾는 팬들이 많은지, 그의 기념품과 야구공들, 작은 조약돌들이 묘비 앞에 제법 놓여 있었고 이 역시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에 놓인 맥주캔을 보며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야구 선수치고 몸 관리 안 하고 잘 놀고 잘 먹었던 베이브 루스. 다즌 에그(계란 12개(dozen)가 묶인 박스) 오믈렛과 맥주 두 캔. 베이브 루스의 아침 메뉴를 기억하는 팬인가 보다. 

어쩌면 나 역시도, 다른 위인들처럼 영웅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장꾸 악동 어른이'같은 베이브 루스의 인간미에 더 끌렸던 것 같다. 잠시 추모의 시간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차를 타고 떠난 줄 알았던 아까 그 추모객이 다시 돌아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말을 걸어온다.

"양키 팬이냐? 어? 양키 팬이냐고!" 

등지도 좀 있으신 분이 걸걸한 목소리로 물어오니 살짝 겁이 났다. 메츠(NY Mets, 우리 동네 구단) 팬이라고 하면 어찌 되려나. '올드팬'이라고 했더니 베이브 루스 보러 처음 온 거냐고 또 묻는다. 그냥 가실 기세가 아니다.

여기는 처음이지만 사실 오래전에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 구장 앞에 있는 동상과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메릴랜드에 살 때였다. 경기 시간이 임박해 코앞에 있는 박물관에 가보질 못한 게 아쉬웠다는 이야길 하는데, 그분이 큰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갑자기 나는 야생야사, 양키 골수팬이 되어버렸다. 그저 엄마가 준 위인 전기를 읽었던 늙어버린 소녀일 뿐인데. 베이브가 온 곳이 보스턴이 아니라 볼티모어라는 걸 아는 이가 잘 없다며 칭찬하더니, 이번엔 루 게릭에게는 다녀왔느냐 묻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 루 게릭
 
▲ 루 게릭 묘소  팬이 올려놓은 야구공이 묘비 위에 있다. 평생을 홀로살며 루게릭병 연구지원을 했던 부인 엘레노어도 함께 잠들어 있다.
ⓒ 장소영
물론이다. 그에게 이미 다녀오는 길이다. 덩치 큰 악동 베이브와 달리, 건실하고 신사적인 이미지였던 루 게릭. 홈런왕 루스가 3번, 루스의 득점 기록을 깨버린 득점 왕 게릭이 4번.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살인 타선 아니겠는가. 같은 독일계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투타 겸업 선수로 시작해 타자로 전향한 후 역대급 명성을 얻은 것도 똑같은 두 좌투좌타 선수들. 

그의 위대한 기록이 병마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세계 제일의 독보적인 좌타자, '저는 지구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나이입니다(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n the earth)'라는 은퇴사가 아직도 회자되는 양키의 영원한 1루수.  

묘비도 왠지 그를 닮아 참하고 주변 분위기도 차분하다. 묘비 위에 팬이 올려놓고 간 야구공마저도 경건해 보인다. 이 오래된 공이 어떻게 굴러 떨어지지도 않고 여태 그대로 있는지 신기했다.

묘비 앞 꽃들도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루 게릭의 부인 엘레노어는 자녀도 없이 재혼도 하지 않고, 남편을 앗아간 병을 연구하는 일을 평생 지원하며 살다가 이제는 남편 곁에서 함께 영면하고 있다.

기념일을 잘 못 외는 편인데, 이상하게 루게릭과 관련한 몇 날들은 저절로 떠오른다. 6월 2일 10시 10분 생을 마감했고, 그날이 루 게릭의 날이 되었다든지, 6월 3일 한 경기 4개 홈런을 날린 날이라든지.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은퇴식을 했고, MLB 최초의 영구결번 4번의 주인공이자 병마가 멈춰 세운 2130 연속 출장 기록 같은 거 말이다.

양키스 유니폼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빌리 마틴 감독
 

"오호, 이봐 진짜 양키 올드팬, 빌리 마틴은 어디 있는지 알아?"

빌리 마틴이라니. 양키에 악동 선수로는 베이브 루스가 있다면, 악동 감독으로 빌리 마틴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루 게릭의 위대함이 병마에 가려졌다면, 마틴의 위대함은 술에 가려졌다고들 한다. '그놈의 술 때문에' 선수 생활, 감독 생활 내내 숱한 말썽 에피소드를 남겼고, 결국 크리스마스에 만취한 친구가 몰던 트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감독.

그가 활약하던 때에 86 부산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이 있어서 내 관심이 온통 그쪽을 향했지만, 특히 말도 안 되는 팀이나 말 안 듣는 선수 조련가로 유명했던 감독이 아닌가. 마치 영국의 스포츠 코미디 드라마 <테드 래소>의 주인공처럼. 

그가 여기에 묻혀 있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갑작스러운 사고사 소식을 듣고 평소에 늘 으르렁거리던 구단주가 베이브 루스 근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언덕배기 베이브 루스의 묘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되지만, 걸걸한 목소리의 추모객은 한사코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차를 타고 따라오라 한다. 양키 유니폼이 자랑스럽다 했던 그 빌리 마틴 맞는지 확인차 되물으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가보면 안단다.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도 여쭙지 못했다. 

폭염에도 꽃들이 시들지 않았던 이유
 
▲ 빌리 마틴 감독의 묘비 묘비 오른편에 그의 영구결번 1과 함께 양키 유니폼을 자랑스러워했다는 어록이 새겨져 있다. 양키스 팀이 위기에 처할때면 그를 불러들여 사령탑을 맡기곤 했다. 드라마 '테드 레소'를 보면서 빌리 마틴이 떠올랐었다. 선수와 구단주와 충돌은 많았으나 팀과 선수를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는 명감독이었다.
ⓒ 장소영
가보았더니 정말 알게 되었다. 묘비에 쓰여 있었다. 영구 결번 1번과 함께. 
'아마 나는 양키 유니폼을 입은 가장 위대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유니폼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은 나다.'(I may not have been the greatest Yankee to put on the uniform but I was the proudest.) 
 
▲ 마이클씨와 함께  옷 색을 맞춰 입고 나왔다며 만날 인연이 있었나보다라고 웃었다. 건강하시길 빈다.
ⓒ 장소영
거기서야 비로소 왜 양키인들의 묘비 앞 꽃들이 폭염에도 시들지 않고 생생히 피어 있었는지, 야구공들이 굴러다니지 않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 마이클이야. 사진? 좋지. 같이 찍자. 여기? 매일 오지, 일을 마치고 나면. 생각해 봐. 요즘 같은 날씨에 하루라도 걸르면 꽃들이 살 수 있겠어?"

마이클씨 덕분이었다. 그의 차 트렁크엔 여러 개의 커다란 생수병들과 쓰레기 봉지, 청소 도구들이 있었다. 묘비를 닦고, 주변을 정리하고, 꽃에 물을 주는 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이 일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할 생각일까? 언제부터 했는지도 모르겠고, 언제까지나 할 생각이라며 웃으신다. 괜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마이클씨 폭염에도 꽃이 시들지 않는 비밀을 알았다. 야구 사랑이 시들지 않는 야구팬 덕분이었다.
ⓒ 장소영
야구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경기

한 야구팬에게 물었다. 야구의 매력이 대체 뭐냐고. '휴머니즘의 극치'라고 바로 대답한다. 다른 구기 종목들은 공의 위치가 득점을 결정하지만, 야구는 사람의 위치 즉 사람이 홈으로 들어와야 득점을 하게 되는 유일한 종목이라고 덧붙이면서. 그래서일까. 팬들은 영원한 홈(an eternal home in heaven)에 들어간 이들을 잘 잊지 않는다. 오늘 만난 마이클씨처럼. 

오타니 쇼헤이가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아메리칸 리그 홈런 1위에 올랐다. 아직 시즌중이니 더 많은 공을 담장 위로 넘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이클씨에게 한 수 배웠다. 야구는, 기록이 기억이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 사람이 기억이 되는 스포츠라는걸. 
 
▲ 천국의 문 공원묘지 (Gate of Heaven Cemete) 베이브 루스 선수와 빌리 마틴 감독의 묘소가 있는 게이트 오브 헤븐 공원묘지. 영원한 '홈'에 들어간 야구인들을 기억하는 야구팬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던 듯 하다.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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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베이브 루스와 빌리 마틴은 Gate of Heaven Cemetery에, 루 게릭은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Kensico cemetery에 묘소가 있습니다. - 개인 브런치에도 같이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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