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시와 만 원대 스파클링 와인, 눈이 번쩍 뜨였다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자말>
[임승수 기자]
책을 여러 권 쓴 저자이다 보니 종종 이곳저곳에 초청돼 강의하곤 한다. 질의응답을 받다 보면 간혹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그럴 때면 능글능글한 웃음을 머금고선 인터넷서점 검색창에 '임승수'를 치라고 얘기해준다.
사람들은 강사가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며 박장대소하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절실한 영업사원의 마음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먹고살려면 안면에 철판 깔고 일단 내 책부터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트의 와인 매장에 파견된 수입사 직원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고객이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자사 수입 와인 위주로 소개해야 할 테니 말이다. 얼마 전 자주 들르는 마트 와인 매장에서 K수입사 직원과 대화를 나눌 때도 응당 그러리라 예측했다.
"가성비 좋은 저렴한 와인 좀 추천해주세요."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마침 할인 중이라 9900원이에요."
"(라벨을 살펴보다가) 다른 수입사 와인인데요? 기왕이면 K사 와인 사드려야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거 마셔봤는데 아주 좋았거든요."
▲ 울프 블라스 이글호크 퀴베 브뤼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라운 가성비의 와인이다. |
ⓒ 임승수 |
울프 블라스 이글호크 퀴베 브뤼. 울프 블라스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제법 인지도 있는 호주 와인 회사다. 이글호크는 제품명, 퀴베 브뤼는 달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비싼 와인은 찾아보기 힘든 내 셀러 안에서도 그야말로 독보적 최저 몸값인지라 프로야구단의 만년 후보선수처럼 제일 밑에 처박아두었다.
라벨 때깔이 달라 보이네
며칠이 지났다. 뜬금없이 포케를 먹고 싶다는 아내의 요청이 있어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갑작스레 특정한 음식이 떠오르는 날에는 십중팔구 술도 마시게 된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 애지중지하는 선발투수를 올릴 수는 없으니 부담 없는 패전처리 투수를 마운드로 호출했다. 셀러 저 밑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이글호크 말이다. 최저연봉 선수이니 실패하더라도 본전 생각이 덜하지 않겠는가.
배달 그릇에 담긴 채소와 곡물을 아무렇게나 퍼서 입에 쑤셔 넣은 후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다가 별다른 기대 없이 패전처리 투수의 공을 구강으로 받아냈다. 순간 사백안이 될 정도로 눈이 번쩍 뜨였다. 어럽쇼? 이거 뭐지? 시속 98마일의 꿈틀대는 강속구는 아니지만, 대략 89마일의 패스트볼이 타자 무릎 높이로 날아와 아웃코스 꽉 차게 꽂힌다. 이건 최저 연봉자의 기량이 아닌데?
자세를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린 후 재차 날아오는 투구를 구강으로 받았다. 느낌이 왔다. 이건 진짜배기다. 약팀이라면 5인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맡길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할인가 9,900원이라니! 함께 마시던 아내도 칭찬에 동참한다. 라벨에 그려진 수리매(이글호크)의 때깔이 달라 보일 정도다.
패전처리로 나와서 이 정도 기량을 보여줬다면 중요한 시합에 선발투수로 내세워서 제대로 검증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글호크 재구매를 위해 다시 마트를 방문했는데 아쉽게도 할인 기간이 끝나 가격이 14,800원이 되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전성기의 류현진 수준으로 제구된 89마일 직구의 짜릿함을 떠올리면 14,800원 역시 가성비 연봉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 시합은 곁들일 음식으로 스시를 선택했다. 내가 스파클링 와인을 마실 때 선호하는 음식+와인 조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내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음식이다. 특정 음식이 4인 가족 구성원 모두를 빠짐없이 만족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스시는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내는 훌륭한 음식이다. 다소 비싸서 자주 못 먹는 게 아쉬울 뿐.
만날 시키던 데 말고 좀 새로운 데서 시켜보라는 아내의 타박에 배달앱 평점, 네이버 평점 등을 두루두루 살펴보다가 한곳을 골랐다. 배달 스시집 맛이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식도락가의 혓바닥은 배율이 높은 현미경과도 같아서 한 끗 차이가 상당히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 먼 우주에서 보면 이 거대한 지구조차 파란색 점 하나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미각에 있어서는 여전히 망원경보다는 현미경 쪽을 선호하게 된다.
드디어 초인종이 울리고 초고배율 전자현미경과도 같은 나의 혓바닥을 가동할 순간이 왔다. 뚜껑을 열고 맨 처음 집어 든 건 뿔소라를 올린 녀석이었는데 일단 소라가 큼직하니 인심이 좋아서 합격이다.
▲ 스시와 스파클링 와인 내가 스파클링 와인을 마실 때 매우 선호하는 음식+와인 조합이다. |
ⓒ 임승수 |
이제 선발 등판한 이글호크 투수의 기량 점검에 들어갈 차례다. 과연 놀라운 가성비가 재현될 것인가? 아니면 그날은 그저 운 좋게 야구공 실밥이 긁히는 날이었을 뿐인가? 기대 반 우려 반 심정으로 쩍 벌어진 포수 미트에 와인을 투척했다. 변함없이 89마일의 패스트볼이 타자 무릎 높이로 날아와 아웃코스 꽉 차게 꽂힌다. 이 녀석 확실히 물건이구나!
대단한 풍미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1만 원대 와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놀라운 밸런스가 인상적이다. 감귤, 복숭아, 배 등이 연상되는 은은한 과실 향에, 쓰지 않고 신맛도 튀지 않고 모든 요소가 야구공처럼 둥근 형상을 이룬다. 눈을 감고 야구 경기가 벌어진다고 상상하니, 날카로운 제구력으로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30대 초반의 털털하고 경험 많은 투수가 떠오른다. 오늘은 9이닝 1실점 완투승이구나!
마실수록 흥겨워지는 기적의 액체
그나저나 내가 스시와 스파클링 와인의 조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뽀글뽀글 탄산이 와인의 신선함과 청량함을 한층 배가시킨다. 그 신선함과 청량함 덕분에 스시를 계속 먹어도 물리지 않으며, 언제든지 다음 스시 투입이 가능하도록 구강 내부 환경이 유지된다.
물론 탄산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방울을 품고 있더라도 사이다였다면 달기만 해서 뒤끝이 찝찝할 테고, 탄산수였다면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아 허전할 것이다. 와인은 달지 않으면서도 과실 향이 풍부하고, 마실수록 흥겨워지는 생화학적 효과까지 유발하니 그야말로 기적의 액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발투수의 제구력에 감탄하면서 투구를 연신 구강으로 받아내다가 문득 만화 <신의 물방울>이 떠올랐다. 만화에 등장하는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칸자키 유타카는 엄청난 규모의 유산(와인)을 남기고 사망한다.
그는 유언장에 최고의 와인 12종(일명 12사도) 목록을 남겼는데, 두 명의 자식 중 12사도를 더 잘 맞추는 쪽에 유산을 넘겨주겠다고 선언했다. 사연 많은 배다른 형제가 12사도의 정체를 놓고 벌이는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만약 내가 먼 훗날 재산 상속과 관련된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가성비 기준으로 12사도를 정한다면, 아마도 한 자리는 '울프 블라스 이글호크 퀴베 브뤼'가 차지하지 않을까.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다만 지금 내 상황과 형편을 고려하면 과연 추후 두 딸에게 물려줄 유산이랄 게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러니 12사도 운운하며 주접떨지 말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온 가족이 이글호크 한 병을 나눠 마실 순간이나 기다리련다. 아차! 그때는 한 병이 아니라 두 병이 필요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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