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데파트-껄' 보려는 남성들…'자만추' 핫플 된 백화점

2023. 8. 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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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소비 욕망의 해방구 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었던 미쓰코시백화점 전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치마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거지를 가까스로 물리치고 백화점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그야말로 별천지다. 텁텁한 바깥 공기와는 사뭇 다른 향긋하고 야릇한 도회적인 냄새와 유리 진열장 안에 펼쳐진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오감을 자극한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총총거리던 발걸음 속도가 줄어든다. 1930년 8월 29일자 조선일보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순과 엘리베이터와 마네킹과 옥상정원 이러한 것들이 주출하는 특이한 긔분 이것이 근래의 요귀 데파-트먼트”가 경성에 등장해 도회인의 소비력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경성에는 5개의 백화점이 성업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쓰코시(오늘날 신세계 본점)와 조지야(오늘날 롯데 영플라자 위치)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다. 이 두 곳과 더불어 한반도와 일본 내지(內地), 만주에 이르기까지 십여 개의 지점을 둬서 ‘백화점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던 미나카이, 생활용품이 저렴해 서민층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히라타는 모두 일본 백화점으로서 본정(충무로) 일대에 밀집해 있었다. 유일하게 조선인 자본으로 종로에 자리를 잡은 화신도 점차 가열되던 백화점 상업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밖에도 백화점이라는 간판을 단 크고 작은 양품잡화점이 수없이 생겨났다.

꽉 막힌 결혼시장 문을 열어준 존재

화신의 점주 박흥식은 요즘으로 치면 워커홀릭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오전에는 매일 같이 선일지물과 인쇄소에서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백화점을 시찰하고 운영회의를 계속했다. 손에는 새로운 사업계획에 대한 메모가 잔뜩 든 가방이 항시 들려 있었다. 매주 월요일 화신 5층 옥상에서 열린 직원 조회에서는 상업에 대한 상식과 직원들의 단결을 강조하는 박흥식의 탁월하고 명철한 훈화에 많은 점원들이 감복했다 한다. “남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하자”는 신조를 가진 혁신적인 사업가로서 일본 내지에도 없는 체인스토어, 즉 연쇄점을 구상하여 1935년 350개의 지점을 완성했다.

화신백화점 여직원은 대체로 16~23세까지의 처녀들로서 이들을 보통 ‘데파트-껄’, ‘쇼프껄’이라고 했고 판매 담당을 ‘우리꼬(賣リ子)’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쓰코시의 쇼프껄들은 보통 월 30원 정도의 급료를 받아 다른 백화점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이들은 대개 순명, 진명여학교나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마친 비교적 점잖은 집안의 딸들로서 외모를 우선으로 뽑았다.

백화점 중 유일하게 조선인 자본으로 종로에 자리를 잡았던 화신백화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미모의 인텔리 여성을 보기 위해 청년들은 백화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 때문에 “미쓰코시에는 일 년 이상 가는 우리꼬가 없다”고 할 정도로 백화점을 곧 그만두고 시집을 가버리는 직원이 많았다. 잡지 『삼천리』는 이들을 두고 “남녀교제의 관문이 꽉 막힌 밀폐된 결혼 시장의 문을 열어주는 귀여운 존재”라고 표현했다. 당시 자유연애, 자유결혼이 시대의 새로운 풍조로 등장하면서 백화점은 요즘 세태말로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지향하는 이들의 장소였던 셈이다.

하지만 심훈의 소설 『영원의 미소』에서 그려지듯 생활고에 시달려 한때 문사였던 최계숙이 백화점 화장품부에서 마네킹처럼 하루 종일 서서 뭇 사람들의 관음증적 시선을 견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신의 경우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2시간 꼬박 서 있어야 하는 극한 직업이었다. 앉을 수도 없이 퉁퉁 부은 다리로 고객을 응대하는 어린 처녀들이 물건을 사느라 10원짜리 100원짜리를 포켓이나 핸드백에서 꺼내어 주저 없이 쓰는 손님을 바라볼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또 어떠했으랴.

미쓰코시와 정자옥(조지야)은 방인근의 소설 『마도의 향불』(1922~1933)에서 등장인물들이 세련된 양복을 맞추거나 애인에게 목도리 같은 ‘프레센트(선물)’를 사는 백화점이다. 명절을 앞두고는 ‘증답품’이라고 부른 선물 용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시 백화점은 주로 미국 백화점을 모델로 했다. 그 때문에 층별 상품 구성이 서구 백화점과 거의 같고 오늘날까지도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맨 윗층에는 식당과 이벤트홀, 그 아래층은 가구와 가전, 중간층에 의류, 1층에는 잡화, 지하는 식품이 주로 자리한다. 백화점 식당은 양식, 화식, 조선식이 두루 갖춰져 있었고 라이스 카레, 야사이 사라다(야채 샐러드), 가쓰레쓰(커틀릿) 같은 새로운 메뉴가 유리 진열장 안에 모형으로 갖춰져 있었다. 여유 있는 가족의 외식 및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였는데 지갑이 얇은 샐러리맨들도 가끔 들렀다.

철마다 옷 해 입는 기생들이 중요 고객

미쓰코시백화점 엘리베이터 앞에 선 엘리베이터 걸 모습. [사진 『조선과 건축』 9집 11호]

백화점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의류였다. 주로 2, 3층에 위치한 의류 코너에는 신사복, 숙녀복, 아동복이 판매되었다. ‘레디메이드’라고 부르는 기성복은 맞추는 데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맞춤복에 비해 저렴했고 바로 입어보고 살 수 있어 양복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백화점 부인복 코너에는 귀부인같이 성장(盛裝)을 하고 하녀를 데리고 부군을 따라 비단을 사러 오거나 옷감을 만져보면서 그 당시 시쳇말로 ‘껄렁껄렁하다(시시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점원은 으레 비싼 것, 유행하는 것을 권했다. 겨울 조지야에서는 ‘모피-데이’ 행사가 열렸고 철마다 유행하는 옷을 해 입고 손님을 맞는 기생들은 백화점 주단포목부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다. 얼핏 보면 본견과 비슷한 값싼 인조견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백화점은 말 그대로 백화(百貨)가 넘쳐나는 공간이지만 여기에서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 이벤트, 볼거리도 이곳으로 가는 이유였다. 물건을 사면 가까운 곳은 자전거 부대가 배달해 주었고, 아이들과 남편 옷을 유행하는 스타일로 손수 지어 입힐 수 있도록 하는 재봉강습회는 여염집 부인들에게는 외출의 명분이었고, 백화점은 집객과 판매를 촉진하는 기회였다.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은 이상의 소설 『날개』 속에서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속으로 외친 ‘나’처럼 답답하고 무기력한 도회인의 감성을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옥상은 여름이면 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늘이 있고 시원한 분수대와 탄산음료를 파는 소다 파운틴(soda fountain),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장, 산책길, 온실과 갤러리까지 갖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조지야를 비롯하여 옥상에 작은 온실과 동물원을 갖춘 백화점도 있어 꽃과 새, 원숭이도 구경할 수 있었다. 여행객을 위한 ‘투어리스트 뷰로’와 ‘조선물산’이라고 부른 토산품점도 백화점 1층에 자리했다. 조지야는 치과부, 사진부가 있어 백화점에 들른 김에 치과 진료를 받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어 편리했다.

사람이 몰려 늘 붐비는 만큼 백화점에는 크고 작은 범죄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만빗기(훔치기)’와 ‘와스리(소매치기)’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많았다. 만빗기 범죄자는 시로토(서투른 사람)가 7할에 상습 전문가가 3할, 남자가 3할, 여자가 7할의 비례였다. 훔치는 상품은 대부분 일용 잡화였다. 스리는 특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활동하거나 손님이 물건을 고르는 사이 핸드백이나 보자기를 도둑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백화점 1층에는 청원 사복형사가 혹여 발생할 지도 모를 범죄를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백화점은 밑 빠진 항아리처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발전소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김기림의 표현대로 ‘욕망의 집어등’처럼 강하게 이곳에 끌리고 말았던 것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최지혜 미술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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