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과 제도가 국가 존망을 결정한다는데 [홍기훈의 ‘세계를 바꾼 경제학 고전’] (12)
책의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는 1993년부터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교수직을 맡아온 터키 출신 미국 경제학자다. 그는 정치 제도가 국가 경제 발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왜 한 나라는 부강하고 다른 나라는 가난한지에 대해 애쓰모글루가 제시한 설명은 학계는 물론 대중 사이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인 부모님 아래 태어난 애쓰모글루는 25살에 런던 경제학교(LSE)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LSE에서 1년 동안 강의를 한 뒤, MIT에 합류했다.
필자는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과정에 있을 때 세미나차 방문한 애쓰모글루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그는 차세대 노벨상 수상자라고 불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단한 커리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애쓰모글루는 사석에서는 매우 친절하고 수다스러웠으며 수더분했다.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세미나를 시작하자 돌변했다. 지적은 매우 날카로웠고 연구에 진심이었으며 열정적이었다.
애쓰모글루는 정치경제학 분야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백 편의 논문을 집필했다. 많은 논문을 동료인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과 공동 저술했다. 그중 하나가 이번 칼럼에서 다룰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다. 책은 2012년 애쓰모글루가 제임스 로빈슨과 함께 집필했다. 국가의 경제 결과를 형성하는 데 정부 기관 역할을 분석한 게 주 내용이다. 처음 발표됐을 당시, 학계와 미디어로부터 폭넓은 평론을 받았다.
지구촌 빈부 격차는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익숙함을 걷어내고 살펴보면 매우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나라는 역사적으로 부강했거나 혹은 급속히 부유해졌지만, 어떤 나라는 국민 대다수가 절대 빈곤을 탈출하지 못한다.
이 현상에 많은 학자들이 자신만의 대답을 내놨다. 문화사회학자들은 자유주의와 근면을 추구하는 서양 개신교 문화가 서구권의 번영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대륙별로 불균등한 자원 분포가 각 문명의 성패를 갈랐다고 설명한다. 경제학자들은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경제 개발 비법을 전수하지 않았기에 개발도상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패한 국가와 성공한 국가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
위의 이론들은 지금의 지구촌 빈부 격차를 결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애쓰모글루는 열쇠가 역사 속에 있다고 말한다. 긴 시간에 걸쳐 나라의 기틀로 자리 잡은 제도가 국민의 빈곤 또는 번영을 결정한다는 것. 그는 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수많은 문명의 예시를 든다. 이 나라들이 역사적 분기점에서 어떤 제도를 받아들였는지, 혹은 강요받았는지에 의해 달라진 결과들을 설명한다.
애쓰모글루는 책의 서두부터 결론을 던진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쏟은 노력의 대가를 사람들이 온전히 누리고, 이를 위해 기존 질서를 벗어던지고 혁신을 일으키는 ‘창조적 파괴’가 가능한 제도가 국가를 번영으로 이끈다고 강조한다. 반대로, 혁신의 대가를 몰수당하거나 혹은 기존 질서에 대항한 대가로 목숨을 내놔야 하는 제도 아래에서는 결코 번영을 지속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개인이 자기 노력의 성과를 차지할 수 있는 환경은 번영의 전제 조건이다. 착취적 경제 질서가 수립된 것은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제도가 어떻게 경제 제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지는 콩고의 예시에서 잘 드러난다. 콩고는 대항해 시대 유럽 국가들과 조우했을 때 이미 중앙집권을 달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왕은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신문물을 경제 발전이 아니라 자신의 체제를 굳건히 하는 데 사용했다. 콩고의 군주는 많은 신기술을 뒤로하고 총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노예를 잡아 수출함으로써 왕실 재정을 불리기 위함이었다.
반대되는 예시가 바로 영국이다. 14세기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흑사병에 영국 인구는 급감했고, 노동력이 귀해졌다. 이런 배경 아래 농민은 기존의 노예제와 같은 착취적 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 같은 체제가 세워졌다. 아직 민주주의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기득권에 대항하는 신흥 세력이 나타나며 다원적인 정치 구조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것이 산업혁명의 시발점이 된 창조적 파괴로 이어졌다. 다원적 정치 제도에서는 지배 세력이 힘으로 혁신을 억누를 수 없다. 신기술을 토대로 한 신흥 세력이 기득권을 몰아내는 창조적 파괴가 연일 일어난다. 증기 기관과 방적기, 기관차와 같은 발명품이 쏟아졌고 이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경제와 정치는 뗄 수 없다. 착취적 제도는 개인의 번영을 위한 동기를 없앤다. 설령 혁신이 등장한다 해도 이런 변화의 움직임을 지배층이 일소해버린다. 반대로, 포용적 제도 아래서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혁신한다. 개인의 노력과 혁신은 기존 질서를 흔드는 창조적 파괴를 수반한다.
책은 출간 후, 학계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동시에 다른 학자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평을 받으며 국가의 번영과 빈곤이라는 주제의 열띤 담론을 열었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프리 삭스, ‘역사의 종언’을 쓴 저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반박했다. 이에 대해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이 다시 대답하면서 논쟁은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21세기 국가적 빈곤의 기전은 무엇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손을 써야 할지를 제시한다. 긴 시간 동안 제3세계 빈곤은 지리적 운명에 의한 불변의 것으로, 그저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워싱턴 컨센서스와 같이 현지의 역사적, 제도적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천편일률적인 해결책만을 처방받아왔다. 혹은 대중은 물론 학계의 많은 사람이 권위주의적 정부의 단기적 성과에 현혹돼 착취적 제도를 기꺼이 도입하도록 부추겼다.
애쓰모글루는 선행하는 이론들보다 더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적용 가능한 설명을 제시한다. 번영의 열쇠는 지배자가 국민을 착취하는 체제를 개혁하고, 모두가 동등한 권한과 기회를 갖는 제도를 수립하는 데 달려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테라사이언스, “신안리튬 정밀탐사 차질 없다” [오늘, 이 종목] - 매일경제
- [단독] 서울 노른자위 용산마저도…키움證 500억 ‘브리지론 디폴트’ - 매일경제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별세 - 매일경제
- 물 만난 미용 의료 기기...실적·주가 릴레이 ‘환호’ - 매일경제
- 천덕꾸러기 ‘리츠’?...韓 오피스는 나름 순항 [MONEY톡] - 매일경제
- 셀트리온 3사 합병 후 잘될까...한투 “매출 추정치 공격적, 단기 수익성 고민해야” [오늘, 이 종
- 대구 아파트값 3억~4억씩 ‘뚝뚝’...“바닥 아직 멀었나” [김경민의 부동산NOW] - 매일경제
-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 공개 하루 만에 7%대 약세...왜? [오늘, 이 종목] - 매일경제
- 한강변 수방사 부지는 ‘선당후곰’…19일 막 오르는 ‘뉴홈’ 사전청약 - 매일경제
- 유럽 400개 매장 돌파...‘디어,클레어스’ 알고 보니 K뷰티였네 [내일은 유니콘] -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