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에는 없는 오펜하이머 이야기
[하성태 기자]
▲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 영문 포스터. |
ⓒ NBC |
"10만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마음이 편할 수는 없습니다."
노년의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심 끝에 이렇게 답했다. 어찌보면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또 달리 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답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과학자가 자신이 풀어놓은 괴물의 위력을 몰랐다면 바보요, 또 뒤늦게라도 자신이 풀어 놓은 괴물을 제어하려는 노력조차 않았다면 창조자인 본인 스스로도 괴물이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
"오펜하이머는 평생에 걸쳐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결등을 겪었습니다. 정답이 없는 수많은 질문과 맞닥뜨려야 했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이렇게 평했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놀란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 왜 그리도 빽빽한 질문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드는 인물평이 아닐 수 없다. 놀란 감독이 인터뷰이로 직접 카메라 앞에 선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는 그의 견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귀하고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다.
제87주년 광복절이던 지난 15일 개봉한 <오펜하이머>가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하며 200만 돌파를 목전에 뒀다. 25일까지 197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러자 <오펜하이머>의 원작에 해당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판매가 급증했다는 소식이다. 3시간짜리 영화를 보고도 성에 안 찬 관객들이 2006년 퓰리처 상 전기·자서전 부문을 수상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까지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영화 개봉 전 예습한 국내 관객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에서 <오펜하이머> 개봉에 앞선 지난달 10일 공개된 <전쟁의 종식자>은 원작 읽기가 조금은 부담스러울 이들에겐 더 없을 대체제에 해당한다. 아니, <오펜하이머>의 놀란 감독이 직접 출연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영화가 건드린 화두나 역사적인 배경들이 빼곡이 채워져 있어 도리어 놀라움을 던져 준다. 미 NBC가 제작했고, 국내에선 쿠팡플레이에서 공개 중이다.
과학자 오펜하이머가 지녔던 고뇌나 한계 등을 알아가는 데는 <오펜하이머>보다 쉽고 직접적이다. <오펜하이머>가 작가주의 감독 놀란이 쓴 예술적 평전(관련 기사: "빨갱이 아니란 걸 증명해봐" 이 과학자가 마주한 질문)이라면 <전쟁의 종식자>는 오펜하이머의 손자까지 나선 다성의 견해들로 채워진 전형적인 평전 다큐다. <오펜하이머>엔 찾아 볼 수 없는 비판적인 견해나 장면들이 존재하기에 더더욱 가치 있다.
▲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 속 노년의 오펜하이머. |
ⓒ NBC |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동시에 원자폭탄의 실체를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히틀러에 대한 공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컸다.
당장 히틀러의 손에 원자폭탄이 들리게 되리라는 공포는 2023년의 우리는 상상도 못할 크기였으리라. 당시 과학자들의 1순위 목표도 무조건 독일보다 원자폭탄을 먼저 만드는 것이었다. 히틀러에 대한 공포는 서구 문명 자체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존재론적 두려움이었다. 원자폭탄 사용과 피해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회의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킬 겨를이 없었다는 얘기다.
훗날 인터뷰에서 오펜하이머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인류 역사의 방향에 분명히 개입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고 회고했다. 한 역사가는 "원자폭탄 개발의 결과에 대해 생각이 부족했다며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라며 회의적으로 물었지만 이미 애초부터 히틀러에 대한 공포가 유태인인 오펜하이머와 다른 과학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1945년 4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사망한 데 이어 히틀러도 자살했다. 세계가 격량에 휩싸였다. 그때까지 나치 독일은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지 못했다. 미국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공포가 사라져 버린 셈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폭탄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야 그 실체를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일종의 과학자들이 가지는 오만으로 비춰질 여지가 없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 역시 폭탄 개발을 지지했다. 일본군은 여전히 저항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핵무기가 등장하면 전쟁은 멈출 것"이란 오펜하이머의 예측은 현실이 됐지만.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동양 철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습니다. 폭격은 파괴 행위이자 잠재적인 창조 행위이며 전쟁 도구인 동시에 평화의 도구라는 것이죠. 폭탄을 잘못 다루면 인류가 멸망하겠지만 제대로 제어하고 다루면 전 세계를 평화의 시대로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한 미국 역사학자의 평가다. 그리하여 오펜하이머는 핵실험에 박차를 가했고 성공을 이뤘다. 훗날 방송 인터뷰에서 오펜하이머는 당시를 회고하며 그 유명한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도다'란 경구를 이렇게 인용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과학자로서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러나 죽음이나 학살에 더 가까워진 듯한 인상을 주는 회고였다.
"이제 세상은 전과 달라졌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으며 대부분은 침묵했습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속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비슈누 신은 왕자가 자기 의무를 다하도록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깊은 인상을 주도록 팔이 여러 개별 형태로 나타났고 이렇게 말했죠.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도다'. 우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 속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
ⓒ NBC |
<전쟁의 종식자>는 원자폭탄 개발 전후를 주요 서사로 풀어가는 동시에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부터 개인사를 조금씩 훑는다. 집안은 부유했지만 다른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다. 모친의 과잉보호는 병적이었다. 타인이나 또래 친구들과 소통하는 법을 차분히 배우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정서불안에 자살 충동까지 생겼던 그는 이론 물리학에서 승승장구하게 됐고, 그 시절 '오피'라는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특이하고 흥미로운 천재에 성격 속 예언자 같던 외모를 두고 한 역사학자는 젊은 시절 밥 딜런에 비유하기도 했다. 출중한 외모였다. 물론 <전쟁의 종식자>는 동생을 비롯해 공산주의자들을 물심양면 지원했던 젊은 시절 오펜하이머의 전력 역시 에둘러가지 않는다. 아내와 애인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다.
실험 직후 오펜하이머는 의기양양했다. 인생의 절정기였고, 본인 스스로 업적을 자랑스러워했다. 의기양양했던 오펜하이머는 스타가 됐다.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즐겼고, 원자폭탄 사용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았으면서도 어느 높이에서 어떻게 떨어뜨려야 하는지 까지 직접 군인들에게 지도하는 열성을 보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셈이다. 한 역사학자는 그런 양면성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윤리 기준이 높고 예민하며 인류애도 충만한 교수가 민간인이 사는 도시에 폭탄 투하를 지시하면서 효과적으로 위력을 발휘할 고도까지 계산해줬다니 이 양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가요? 감히 추측해 보자면 오펜하이머는 그것이 첫 번째 실전 핵무기 사용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듯합니다. 다시는 쓸 엄두가 나지 않도록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를 세상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여기서부터 <전쟁의 종식자>는 <오펜하이머>엔 없는 영상과 증언을 들려준다. 다큐라서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장면들 말이다. 원폭 투하 장면과 원폭 피해자들의 참상이 담긴 영상을 보는 일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애써 외면한 이슈이기도 하다.
일본계 원폭 피해 할머니는 "차라리 그때 함께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폭탄 투하 이후 삶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폭탄개발에 함께한 과학자 중 한명의 딸은 아버지와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맨하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원폭 피해자들 영상을 보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아버지와 동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아셨을까요? 이런 끔찍한 일을 알고도 저질렀다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영화엔 없고, 다큐엔 있는 것
죄책감에 시달렸으면서도 언론의 주목을 누구보다 즐겼다. 그는 미 전역에서 셀럽의 지위를 누렸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중적이었던 물리학의 아이콘이 됐다. 그러한 인기와 지위를 통해 핵폭탄의 위험성을 알리는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면 철저한 오판이었다. 핵폭탄 사용을 경고하고 통제를 요청하는 그를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쫓아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공포로 괴물을 만들어냈던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매카시즘이라는 미국식 전체주의의 희생양이 됐다. 인과응보일까, 사필귀정일까. 전쟁은 끝났지만 냉전이 시작됐다. <오펜하이머>가 집요하게 파헤친 것처럼 원자폭탄보다 수십 배 강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 시달려야 했고 직을 박탈 당했다.
그때부터 미국의 과학자들이 정치 불개입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도 오펜하이머가 당한 고초를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죽을 때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벗은 건 잘 알려졌다시피 2022년 말의 일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양면성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전쟁의 종식자>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오펜하이머의 현재와 과거 인터뷰를 병렬 시키면서 끝을 맺는다. 두 편의 전기 영화와 다큐로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가 평생 던진 질문들을 따라잡은 이들이라면 한층 더 깊은 고민을 던져줄 영혼의 짝패가 던진 마지막 화두는 이거였다.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바꿨습니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죠." (크리스토퍼 놀란)
"하지만 인류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다면 과학은 퇴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유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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