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죽이는 여자들, '마스크걸'의 신선한 시도
[하성태 기자]
"저 다시 시작할 거예요. 예전의 김모미는 죽었어요. 리셋하는 거죠. 완전 새롭게."
"그럼 나는? 나도 지워지는 건가?"
"과장님, 제가 뭘 해주길 바라세요? 네? 자기도 똑같으면서..."
강간남을 토막살인 하고선 뒤이어 찾아온 주오남(안재홍)에게 '첫 번째' 김모미(이한별)가 되묻다 돌변한다. 이에 앞서 주오남은 "이런 감정을 갖는 게 처음이었다"라고 고백하지만 김모미에게 그는 여전히 소름 돋는 스토커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강간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구출한 건 주오남이 아닌 김모미였다. 주오남은 본인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불필요하고 과한 살인을 자행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일방적인 짝사랑의 상대가 자신의 감정과 관계없이 독립적인 미래를 결정하자 주오남도 결국 돌변해 버린다. 순진해 보이던 일본 성인 애니메이션 덕후가 스토커에서 강간범으로 변모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미씨는 내가 지켜줘야 해요. 나 그날 결심했어요. 내가, 내가 이제 모미씨를 지키겠다고. 사랑해요, 모미씨."
고통스럽고 끔찍한 장면이 맞다. 중요한 점은 이런 주오남의 이기적인 행위가 김모미의 성형 사실을 알기 전에 자행됐다는 사실이다. 마스크를 들춰 본 주오남은 붕대를 칭칭 감은 김모미의 얼굴을 보자 "무슨 짓을 한거야"라고 화를 낸다.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마저 소유욕을 드러낸 주오남을 향해 김모미는 "개새끼"란 한마디를 던지고는 자세를 바꾼 뒤 마치 <원초적 본능>의 한 장면처럼 주오남의 목덜미에 아이스픽을 내리 꽂는다.
얼굴을 가린 채 모니터 속에서 몸매와 춤으로 하트팡을 타내던 수동적인 '마스크걸'에서 능동적인 김모미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문제적 장면은 '남자를 죽이는 여자들'의 본격적인 탄생이자 역설적으로 '혐오스러운 김모미의 일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결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 넷플릭스 <마스크걸>의 한 장면. |
ⓒ 넷플릭스 |
지난 18일 공개된 <마스크걸>은 '남자를 죽이는 여자들'이란 강력한 테마와 이를 뒷받침하는 '혐오스러운 김모미의 일생'과 같은 서사를 야심차게 믹스시킨 시리즈다. 외모지상주의란 표면적인 주제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혐오스러운 김모미의 일생'으로 나아가는데, 그 세계는 남자들을 죽이거나 남자들이 죽어야만 '김모미의 '변태(變態)'가 가능하다.
강간의 위험에 처했던 '첫번째' 김모미는 주오남을 죽이면서 변태가 가능했고, 그 직전 성형을 감행한 '두 번째' 김모미(나나)는 처음으로 진정한 연대가 뭔지 알게 해줬던 김춘애(한재이)의 남자 친구를 함께 죽이고, 그 이후 주오남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이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엄마'가 된다.
표현이 세기로 유명한 동명 웹툰을 시리즈화한 <마스크걸>의 진짜 묘미는 이 '변태'하는 김모미가 겪게 되는 굴곡진 세계에 남자들이 철저히 배제되거나 제거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는 설정이다. 김모미의 세계는 아버지가 부재하고, 남자들은 억압하거나 강간하거나 섹스어필의 대상일 뿐이며, 처절하게 경쟁을 하더라도 여성들끼리 맞붙는 그런 세계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김모미는 성형도 하고, 남자도 죽이고, 아이도 낳는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는 자신도 몰랐던 모성애를 지니고 있었음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자각하고, 자식을 위협하는 주오남의 엄마 김강자(엄혜란)에 맞선다. <마스크걸>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자 강점이 바로 김강자의 존재와 활약이다.
주오남을 죽인 범인으로 김모미를 지목한 김강자는 '새끼가 없어지는 감정'을 '너도 느껴봐야 한다'는 심정으로 전국 방방곡곡 '마스크걸'을 찾아 헤맨 끝에 김모미를 찾아내고, 급기야 후반부 김모미의 딸 김미모에게까지 손을 뻗는다. 여자대 여자의 싸움이 모성과 모성의 전쟁으로 끝을 맺는 전개야 말로 '남자를 죽이는 혐오스러운 김모미의 일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걸>은 자칫 드라마 전체가 일종의 '캐리커처'화될 수 여지가 적지 않았다. 첫 번째 김모미와 주오남의 시점을 뒤섞은 1, 2화나 이후 김춘애와 김미모 등 주변 캐릭터의 설명과 성장에 초점을 맞춘 4,5화 등 캐릭터 시점 별로 화자를 바꾸는 실험적인 형식은 김미모나 주변 캐릭터들의 특징점들만 강조하는데 용이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메인 빌런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김강자의 캐릭터 구축이나 개별 서사는 <마스크걸>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동시에 현실에서 있을 법한 전라도 출신 억척스러운 모친이 어떻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연쇄 살인마를 연상시키는 장르적인 괴물로 변모하는 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더 글로리>에 이은 엄혜란의 괴물 같은 연기가 그 감정 이입에 한 몫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그 괴물과 또 다른 괴물의 싸움이 김모미의 딸 김미모를 사이에 둔 모성애의 전쟁으로 진화한 것은 과잉이 아닌 확장이요, 필연적인 전개인 듯 보인다. 외모지상주의란 표면적인 주제로 한정되지 않는 작품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런 후반부 전개의 보편성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 넷플릭스 <마스크걸>의 한 장면. |
ⓒ 넷플릭스 |
"에피소드마다 장르적인 스타일과 톤을 다르게 가져가고 싶었다.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이 바뀌는 구조인데, 주인공이 겪는 사건에 따라 장르적 스타일이나 톤을 맞춰가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김용훈 감독)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라는 멀티 플롯의 인간군상극으로 데뷔한 김용훈 감독의 설명이다.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 벌칸상을 수상하고 영화 <아가씨>를 비롯해 <암살>, <괴물>, <박쥐>, <달콤한 인생>, <올드보이>로 유명한 류성희 미술 감독 역시 "(<마스크걸>이) 에피소드마다 장르가 다른 개별적인 영화들이 모인 듯 거대한 서사를 이루어 내고 작품의 개성과 대중성을 강화시킨다"는 자평을 내놨다.
실제 공개 직후 회차 마다 자신들이 느낀 레퍼런스들을 열거하는 일반 시청자들의 평이 종종 눈에 띈다. '캐릭커처'화란 표현을 쓴 건 그래서인데 중년의 '세 번째' 김미모를 연기한 고현정까지 출중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세 배우가 김모미를 연기하는 전략 역시 캐릭터의 어떤 이질적이면서 신선한 차이를 발산하며 개별 에피소드 만의 재미를 배가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영민한 전략은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먹힌 것으로 판명나는 중이다. <마스크걸>은 공개 <마스크걸> 공개 3일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시리즈(비영어) 부문 2위를 차지했고, 14개국 TOP 10 진입했다.
24일자 플릭스패트롤 기준 TV 쇼 부문 글로벌 2위다. 북미에서 엄청난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한 <뎁 vs. 허드>가 아니었다면 1위도 가능했을 분위기다. 북미에서 조용하지만 남미와 아시아를 주축으로 1위 국가가 늘어가고 있다.
소재 자체가 워낙 자극적인 면이 있고 표현 수위 자체도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위요 글로벌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스크걸>은 선정성 논란을 비켜가도 좋을 만큼 논쟁적이고 도발적인 주제를 흥미로운 형식미로 채운 야심찬 드라마다. 괴작이나 태작들을 자주 내놓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넷플릭스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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