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주는 선배" "대체불가 인재"…1000억 횡령男 두 얼굴

이창훈 2023. 8. 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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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선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었어요.”

고객의 대출 상환금 등 1000억원 가까이를 빼돌린 혐의로 지난 24일 구속된 이모(51) 전 경남은행 투자금융부장에 대해 함께 일했던 동료 A씨는 “이씨는 부동산 사업의 귀재로 불렸다”며 이같이 말했다. 검찰은 이씨에게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해 수사하고 있다.

1000억원대 규모의 횡령 사건이 발생한 BNK 경남은행의 한 지점 모습. 연합뉴스

‘밥 잘 사주는 선배’, 15년 동안 1000억원대 회삿돈 횡령


경남은행 공채 출신인 이씨는 2007년 12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담당하는 부서에 과장이 됐다. 그 무렵 미국에서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의 여파로 사내에서는 부동산 업무를 기피하던 시점에 부동산 관련 업무를 맡았지만 이씨는 이후 위기가 진정되는 국면에서 여러 PF 사업을 성공시키면서 자리를 잡았다. 이후 15년 동안 부동산 PF 업무를 맡으면서 차장, 부장까지 승진했다. 은행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이씨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밥 잘 사주는 선배’라는 평판을 얻었다.

승승장구하던 이씨의 이중생활을 가린 베일은 지난해 9월 예금보험공사가 검찰에 수상한 자금 내역에 대해 수사를 의뢰하면서 벗겨지기 시작했다. 예보는 2011년 파산한 저축은행의 4곳의 부실 책임을 조사하던 중 저축은행과 거래한 특정 건설사와 이씨 사이의 수상한 금융 거래를 발견했다. 2008년~2014년 100억원이 넘는 대출금이 이씨 개인 계좌로 흘러간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자금 추적에 나선 검찰은 수사 의뢰를 받은 지 6개월 만인 지난 4월 경남은행에 이씨에 대한 금융거래내역 조회 사실을 통보했다. 경남은행은 그제서야 이씨를 대기 발령시켰고 금융감독원에도 검찰의 수사 진행 상황이 전달됐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부장 임세진)가 지난 21일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서 숨어있던 이씨를 체포하면서 이씨의 횡령 동기와 자금 사용처 등에 대한 수사도 본격화됐다.

금감원은 지난 2일 경남은행 횡령사고 현장검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씨가 2007년 12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562억원을 횡령·유용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이씨의 횡령 액수가 약 1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연합뉴스

PF 돌려막기로 횡령…아내 명의 법인으로 수백억 이체


이씨는 PF 대출금을 ‘돌려막기’ 하는 방식으로 대출 상환금을 가로챈 것으로 조사됐다. 예를 들어 A업체가 상환해야 할 돈을 자신의 계좌로 받고, B업체가 상환한 돈을 A업체의 상환금으로 꾸민 것이다. 또 부실화된 PF 대출에서 수시로 상환된 대출 원리금을 자신의 가족 계좌 등으로 이체하면서 약 80억원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씨는 PF 시행사의 자금인출 요청서를 위조해 경남은행의 대출자금 326억원을 아내 명의의 법인 계좌로 이체하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씨가 단순히 계좌만 빌려서 이용했는지, 지인과 친인척들이 적극적으로 공모했는지는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거액을 횡령했지만 이씨의 도피는 치밀하지 못했다. 지난달 금감원이 횡령 의혹 조사에 착수하자 이씨는 돌연 연락을 끊고 잠적하면서 급히 도주를 준비했다. 이씨는 지난달 숨어 지낼 오피스텔 3곳을 계약하고, 횡령한 돈 일부를 골드바로 바꿔 은신처에 보관하는 등 도피 자금부터 먼저 확보했다. 검찰은 지난 1일 법원에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전담검거팀을 꾸려 추적에 나섰다. 이씨가 사용한 선불 교통카드와 대포폰 통신 내역을 단서 삼아 서울과 대구와, 경남 사천, 부산 등을 오간 끝에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서 이씨를 붙잡았다. 해당 오피스텔은 이씨의 장모 명의로 계약한 곳으로 검찰은 은신처 3곳에서 외화 상품권과 골드바 등 146억원 상당의 금품도 함께 압수했다.

금감원은 이씨의 장기간 횡령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특정 부서 장기근무자에 대한 순환인사 원칙 배제 ▶고위험업무에 대한 직무 미분리 ▶거액 입출금 등 중요 사항 점검 미흡 등을 지적했다. 기본적인 내부 통제가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논란이 된 우리은행 직원의 약 700억원대 규모의 횡령 사건도 기업개선부에 8년 이상 근무한 직원이 저지른 일이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순환인사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점, 기업 금융 분야에 대한 내부 통제가 부실했던 점이 최근 불거진 대규모 횡령사건의 공통점”이라며 “은행장 차원의 내부통제 책임 강화와 금융사고 보고 체계 강화 등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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