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먼저 온 미래를 대하는 자세

박재찬 2023. 8. 26.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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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찬 종교부장


여명학교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다.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 주민과 탈북자를 지원하던 교회와 현장 전문가들이 뜻을 모아 설립했다. ‘남한에 온 탈북 청소년들과 탈북 주민의 자녀들을 잘 키워서 통일 주역으로 키워내자’는 취지로 2004년 서울 봉천동에서 문을 열었다. 2008년 서울 중구 남산 자락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43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79명이 재학 중이다. 졸업생 중에는 서울대와 외국 유학을 간 이들도 있고, 일부는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어엿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여명학교는 서울시로부터 정규학력을 인정받은 최초의 대안학교다. 2015년에는 요아힘 가우크 당시 독일 대통령이 여명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못했던 것을 이곳(여명학교)에서 하고 있다”고 놀라워했다. 배움에 대한 탈북 학생들의 열정과 이들에게 ‘올인’하는 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찬사이기도 했다.

여명학교는 며칠 전 ‘큰일’을 치렀다. 학교를 서울 모 지역의 한 폐교로 이전했는데 축하 잔치는커녕 이사했다는 얘기조차 꺼낼 수 없는 처지다. 한마디로 ‘도둑 이사’를 한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5년 전쯤 건물 임대만료 기간을 앞두고 이전 후보지를 물색하던 학교 측은 서울시의 도움으로 은평구 쪽에 적당한 부지를 찾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됐다. 극렬한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친 것이다. “죽어도 탈북 청소년은 못 들어온다.” “우리 애들이랑 섞이면 안 된다.” 이런 말들보다 더 깊은 상처로 다가온 건 엄연한 학교 시설인데도 탈북민이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쓰레기 소각장 같은 ‘기피시설’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여명학교 개교 때부터 지금까지 탈북 청소년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조명숙 교장은 당시 “학생들이 이런 얘기를 듣고 굉장히 힘들어했다. ‘너희들이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자’며 달래야 했다”고 토로했다.

은평구로의 이전은 결국 무산됐다. 그렇다고 대체 부지를 서울 밖에서 찾는 것조차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받은 정규학력 인정이 취소되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우여곡절 끝에 결정한 것이 폐교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마저도 인근 주민들이 반발할까 노심초사하면서 짐을 풀었다. 여명학교는 2년6개월 뒤 또 다른 곳을 찾아나서야 한다.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이 같은 일이 끝이 아닐 수 있음을 예견한다. 얼마 전 통일부 장관은 중국에 억류돼 있는 약 2000명의 탈북민을 우리가 난민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제3국에 체류 중인 탈북민들이 대거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탈북민이 더 많아 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전 70주년도 맞물리면서 교계 안팎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줄을 이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주구장창 쏘는 가운데서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콘서트를 열고 기도회도 개최하며 선언문도 발표했다. 하지만 일련의 행사를 접하면서 ‘우리가 통일을 너무 먼 데서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구호와 다짐과 기도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꼭 해야 할 우선순위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조 교장이 학교 이전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를 때 호소한 얘기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조금만 품을 내주세요. 이 아이들을 우리의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주세요. 이 아이들은 ‘먼저 온 미래’입니다. 우리 분단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남북한을 모두 경험하고 한국 사회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탈북 청소년들의 현실이 언젠가 통일 뒤 북한 사람들이 겪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탈북 청소년들이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경험은 북한 주민들과의 통합 과정에 중요한 재료와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먼저 온 미래의 주인공들을 대하는 우리 자세가 너무 야박한 건 아닌지. 그들에게 조금만 품을 내달라는 호소에 귀 기울일 때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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