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숲에서 ‘경계’를 넘어 詩로 만나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윤동주의 시 ‘편지’ 중)
지난 18일 경기도 파주 출판문화단지의 한 게스트하우스. 모든 공간이 책으로 꾸며진 이 공간에 자분자분 시를 낭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이사장 김지철 목사)이 이날부터 1박 2일간 준비한 ‘2030 남북한 청년 독서여행’ 첫날 풍경이다. 북한 출신 청년 5명과 남한 출신 청년 15명으로 구성된 참가자들은 이날 KPI가 배부한 시집에서 인상적인 시를 골라 읊은 뒤 감상을 나눴다. 조별로 나눠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각자 꼽은 시와 이에 얽힌 사연을 경청하며 공감대를 쌓았다.
윤동주 시인의 ‘편지’를 고른 이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 직장인 김노엘씨다. 김씨는 “이 짧은 시를 네다섯 번 반복해 읽었다. 올해 6월 미국에서 만난 지인이 떠올라서”라고 했다. 김씨처럼 탈북민인 지인은 1990년대 초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탓에 지금껏 소식이 끊긴 상태다.
김씨는 “같은 하늘 아래 가족이 살아있을 거라 굳게 믿고 지인은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지냈으니 중국어가 편하지 않을까 싶어 그런다더라”며 “생사도 모르지만 훗날의 만남을 준비하는 걸 보고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씨가 감상평을 마치자 참가자들의 질의가 이어졌다. “‘우표도 붙이지 말고’란 표현을 볼 때 시인은 누나의 존재를 확신했을까”란 질문에 그는 “아마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마음은 있어도 보낼 수 없는 편지라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함북 회령 출신 대학생 A씨도 시에서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읽어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고른 A씨는 “6살 터울 여동생이 중국에서 홀로 대학을 다닌다. 매일 영상통화를 하지만 항상 그립다”고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4년간 만나지 못하다 최근 제주도에서 재회했다는 그는 “직접 만나면 정말 잘 해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 이틀 만에 다퉜다”며 “시집을 읽다 동생이 생각나 스마트폰으로 방금 이 시를 보냈다. 한국어는 못하지만 알아서 해석하라고 했다”며 웃었다.
참가자들은 시집에서 자신만의 ‘최애(最愛) 시’를 소개하며 삶의 애환을 쏟아냈다. 누군가는 연애를, 다른 누군가는 삶의 방향에 관한 고민을 토로했다. 시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마음가짐을 발견한 이도 있었다.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를 택한 대학생 남상백씨다. 남씨는 “‘꽃과 술, 촛불을 정성껏 준비했으나 당신이 오는 게 더 중요하다’는 시구를 읽으며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KPI가 이런 시간을 마련한 건 참가자에게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란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이창현 KPI 사무국장은 “출신지 직업 성별 등 각기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이번만큼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란 공통의 정체성으로 상대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해보기 위해 이번 순서를 마련했다”고 했다. 이어 “특별히 시집을 소통의 도구로 택한 건 산문보다 글밥이 적어 금방 읽을 수 있고 타인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하는 데도 더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독서여행의 첫 일정은 파주출판도시 내 열화당책박물관 관람이었다. 참가자들은 ‘시대의 이야기, 그리움의 노래: 한국문학이 품은 역사와 사람들’을 주제로 전시가 열리는 박물관 내부를 정혜경 학예연구실장의 안내로 둘러봤다. 정 연구실장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전집 등 동·서양 고서를 소개할 땐 책이 바꾼 문명사를, 일제강점기의 책을 소개할 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전했다. 그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 활약한 독립투사의 활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문화와 정치, 민주주의는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대 속 모든 현상의 기저엔 역사가 있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때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독서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그는 “100% 완전한 책은 없다. 학자도 인간인지라 시대가 갖는 한계가 있고 이론에 오류도 있다”며 “아무리 좋아하는 저자의 책이라도 항상 의심을 품고 읽어야 한다. 고전을 읽을 때도 의식적으로 유익한 걸 구분하고 취하려고 노력하라”고 했다.
한반도의 다음세대인 참가자들의 장래를 응원하는 메시지도 전했다. 정 연구실장은 “20~30대 때 겁내지 않고 여러 시도를 해야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며 “여러분의 시기에는 출신과 학교 등의 조건을 넘어 역량을 발휘하는 이들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여러분의 청춘을 축하한다”고 안내를 마쳤다.
이어 참가자들은 파주출판도시 곳곳의 서점과 도서관을 방문해 여유롭게 책을 읽는 시간을 보냈다. 인근 카페에서 조별모임을 하며 서로의 관심사도 나눴다. 대학원생 이은주씨는 “전공과 연령대, 생활반경이 다른 이들과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게 참 오랜만”이라며 “각자의 다양성이 충돌지점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잘 조화될 수 있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튿날 일정은 인근 활판인쇄박물관과 미메시스아트뮤지엄을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100여년 전 인쇄 방식으로 책갈피를 만들고 국내 활판 인쇄사도 살펴보며 책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미메시스아트뮤지엄에선 포르투갈 건축 거장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건물에서 국내 작가의 작품을 두루 구경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어 우미연 우리법률사무소 변호사의 ‘생활법률 특강’을 끝으로 독서여행 일정은 마무리됐다. 법무부 통일법무과 북한이탈주민 지원변호인인 우 변호사는 강의에서 민·형사 소송 구분과 소송지원제도 등 실생활에 유용한 법률 정보를 제공했다.
해산을 앞두고 열린 전체 모임에서 참가자들은 아쉬움을 표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들은 독서라는 공통분모로 다양한 배경의 또래를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고 입을 모았다. 남씨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삶의 경계를 넘어 여러 사람을 만나고 평소 관심을 갖지 못했던 미술과 활자 등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대학생 정시온씨도 “평소 남북 관계와 북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 이번 여행을 신청했는데 와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남북의 벽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더라”며 “책을 매개로 서로를 알아가며 일상을 나눌 수 있어 즐거웠다”고 전했다.
이 사무국장은 이번 독서여행을 계기로 독서모임도 만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책은 누군가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다. 그래서 책을 나눈다는 건 누군가의 세계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라며 “인생을 살며 타인의 세계를 탐험할 기회는 흔치 않다. 책으로 경계를 넘어 누군가의 세계에 들어가고,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초대해보는 기회를 더 만들어보길 권한다”고 말했다. 1박 2일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의 말은 타당성이 있다. 남북엔 경계가 있지만 책 속엔 경계가 없다.
파주=글·사진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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