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한 번쯤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시카고와 런던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서윤정 회사’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며 디자인과 예술 전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윤정 작가도 그런 순간과 마주했다. 지난가을,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 이후 그녀의 가족이 할아버지의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하게 된 것. “유년시절을 주택에서 보냈고 현재 작업실도 삼청동에 있는 단독주택이어서 주택생활의 즐거움을 잘 알고 있어요. 어린 딸에게 주택에서 보내는 사계절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죠.”
집 공사는 만남이 거듭될수록 많은 취향을 공유한다고 느꼈던 디자인 스튜디오 ‘콩과하’가 맡았다. 현관에 들어서면 왼쪽에 1층이, 오른쪽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놓인 이국적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를 위해 만든 계단에는 모두 폭신한 카펫을 시공했다. 1층에는 작업실과 서재가 자리한다. 간단한 스케치와 페인팅 작업은 물론 딸과 함께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한쪽 벽면에 있는 책장에서 영감이 솟을 만한 아트 북을 꺼내 보는 것도 일상의 중요한 일과다. 2층 대부분은 천장이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가장 높은 곳에는 할아버지가 쓰던 샹들리에가 주인이 바뀐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달려 있다. 서윤정 작가가 이 집에서 공들인 부분은 다름 아닌 거실에서 부엌과 다이닝 룸을 잇는 반 층짜리 작은 계단. 두 공간의 바닥 소재가 나무와 타일로 구성돼 있어 서로 소재감은 다르지만, 계단에 카펫을 깔아 이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카펫의 컬러와 패턴은 직접 스케치하고 직조 회사에 의뢰해 완성한 것이어서 더욱 특별하다.
다이닝 룸에 올라서면 눈이 환해지는 라이트 블루 패브릭 빌트인 소파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집 공사를 위해 찾은 수많은 레퍼런스 사이에서 유독 많이 겹쳐서 꼭 시도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가구들은 대부분 이전 집부터 사용했던 거예요. 아르텍 특유의 컬러와 무게감이 마음에 들어 빈티지 숍에 갈 때마다 한 점씩 수집하듯 모으는 중이죠.”
3층에는 안방과 아이방이 있다. 도심의 아파트에 익숙했던 딸은 자신만의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생긴 것에 무척 기뻐하고 있다. 동화 속처럼 작은 침대와 소중한 장난감이 가득한 박공지붕 아래에 있는 다락방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 옆의 둥근 창으로 거실과 다이닝 룸이 내려다보여 혼자 방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이 집의 곳곳을 유일무이한 공간으로 만드는 특별한 소재도 있다. 서윤정 작가가 핸드페인팅으로 만든, 숨은 보물처럼 집 안 곳곳에서 존재감을 반짝이는 타일들이다. 특히 선명한 블루로 포인트를 더한 1층 작업실 세면대, 욕실의 작은 타일 욕조는 그 자체로 예술적 변주를 보여준다. 언뜻 마티스나 멤피스 그룹의 컬러 팔레트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에릭 로메르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며 작은 정원에 장미와 수국을 잔뜩 심었어요. 해를 더하며 점점 풍성해질 정원이 무척 기대돼요.” 17년 된 이 집의 역사를 이어갈 가족의 추억을 생각하니 더욱 풍성해질 것이 비단 정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