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돌려받기까지 넉 달, 다신 안 겪고 싶습니다
[강현호 기자]
몸 고생, 마음고생, 여러 고생 중에 꼭 하나만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돈고생만은 피하고 싶다. 돈고생은 몸 고생, 마음고생까지 포함된 아주 지독한 것이기 때문이다. 4월부터 지금까지, 지난 넉 달 동안 전세금을 돌려받느라 많은 일을 겪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나의 선택이 달랐다면 평온하게 여름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지난 6월이 전셋집 계약이 만료라 이미 4월에 문자로 임대인에게 계약종료를 통보했고, "내일 집 내놓겠다"는 임대인의 답을 받고 난 다음 날부터 새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좋은 집을 발견하고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희 6월에 이사 나가려고 합니다. 별문제 없겠죠?"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는 법이 어딨습니까? 이 집이 먼저 나가야죠."
집주인의 말은 이랬다. '새로 세입자를 구해야 전세금을 내 준다, 그 큰돈이 어디에 있느냐. 이사 날짜는 조정해 주겠지만 계약서상의 날짜는 지켜줄 수 없다. 그게 룰이다. 그리고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았다.'
세상 살면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맞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그날 몇 번이고 전화기로 날벼락을 맞았다. 그때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의사소통이 많이 부실했다.
통상 임차인은 임대인을 꺼린다. 괜히 마주해 봐야 전세금이나 올리고 관리비나 올리지, 그의 입에서 나에게 득 될 이야기가 나올 리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는 짧게 되도록 비대면으로 한다. 내가 그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의식은 늘 무겁다. 임대인은 갑이고 임차인은 을이다. 을이 갑에게 꼼꼼히 따지고 묻고 확인하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틀렸다. 임대인의 사정과 생각을 명확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남의 금전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 마냥 편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제때 전세금은 반환되는지, 안 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한지, 일부라도 돌려줄 수 있는지 등등 많은 것들을 얼굴을 보고 불편하지만 확인했어야 했다. 그게 전세라는 제도를 이용하는 첫 번째 비용이다. 나는 그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다 봉변을 당했다.
▲ 최악의 시나리오 수십 장을 머리로 썼다 지웠다. 불안했다(자료사진). |
ⓒ pixabay |
고민 끝에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이사부터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억울함'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계약서를 썼고, 그간 계약서대로 살아왔는데 정작 내 돈인 전세금을 받을 때는 왜 임대인의 눈치를 보고 허락을 받아야 하나. 왜 그의 사정을 봐주어야 하나?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다. 내 돈 내가 받겠다는데 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새집을 월세로 계약하고 (구)전세 임대인에게 계약서상의 임대만료일에 이사를 나가겠다고 통보했다. 속이 시원했고 정의 구현도 한 듯해 기분도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사흘쯤 갔고, 그 뒤로는 가시방석에 앉게 된다. 내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강했다. 돈을 잃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수십 장을 머리로 썼다 지웠다.
이 또한 전세의 청구서다. 내 돈이 볼모로 잡혀 있고 그 돈은 내 전재산이다. 그 돈이 임대인 통장에서 내 통장으로 고스란히 꽂히기 전까지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그 크기만 다를 뿐이다.
임대인이 제날짜에 돈을 해 주겠다고 해도 이행이 될지는 미지수다. 새 임차인이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고 보름을 남겨두고 임대인에게 사정이 생길 수도 있다. 애초에 임대인이 거짓말할 가능성도 있다. 일상이 위협받을 정도로 생각이 많아진다. 이 비용은 과음이라는 폐해를 동반하기도 한다.
그 후 (구) 전셋집은 계약만료일까지 새 임차인을 구하지 못했고, 임대인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고 우리는 전세금을 남겨둔 채 이사를 감행했다. 이때부터는 청구서가 세진다.
전세보증금을 받지 못하고 이사를 나가는 경우 전세 보증금의 안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이 있다. 내용증명, 임차권등기명령, 지급명령, 민사소송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최종해결책은 민사소송이지만 임대인의 주거가 분명하고 사기꾼이거나 막무가내로 모르쇠 뒤로 숨는 악인이 아니라면 그건 피하고 싶다. 법정을 드나드는 일은 정말 맨 나중이다.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내용증명이고, 좀 굳게 마음먹어야 할 게 임차권등기명령이다.
임차인이 확실하게 계약 종료의 의사표시를 하는 내용증명을 임대인에게 보내는 방법은 간단하고 비용도 비싸지 않다. 하지만 모두 망설인다. 임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법정소송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보증금을 내주겠단 임대인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건 철칙이다. 임대인의 마음을 무시하겠다는 건 소송직행을 뜻하다. 그럼, 정말 싸움이 된다.
전세제도란 내 돈을 주고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돈 빌려주고 그 대가로 남의 집을 담보 잡는 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채권이고 세입자가 채권자이며 임대인은 채무자이다. 그런데도 전세라는 제도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채권자가 을이다. 왜 그럴까?
▲ 정의당 대구시당이 지난 6월 8일 연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피켓을 든 모습. |
ⓒ 조정훈 |
어렵고 복잡한 일인가? 아니다. 이미 확정일자가 전산화되어 있다. 확정일자 관리나 등기관리나 법원이 하는 일 아닌가? 연결만 시키면 되는 일이다.
등기에 올라가 있는 세입자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하다. 그게 전세제도의 표준이 된다면 전세세입자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대신 전세 채권자라고 쓰면 좋겠다. 등기에 이름을 올린 이상 채권자로서는 무서울 게 없다. 적어도 임대인 눈치 봐가며 내용증명을 보내는 일 따위는 사라질 것이다.
전세보증금을 두고 이사 나오면서 가장 신경쓰인 것은 '대항력 유지'였고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임대인의 변심'이었다. 집을 판 뒤 새 주인은 국세 미납자인 데다가 악인이라면 나의 전세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
고심 끝에 나는 전출을 나가지 않았고, 짐도 몇개쯤 남겨놓고 점유 상태를 유지했다. '전입, 점유, 확정일자'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대항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졸지에 우리 가족은 서류상 이산가족이 되었다. 이 또한 비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에 따라 추가 비용이 줄을 잇는다.
그렇게 하고도 불안했다. 이제 와서 전세권등기를 할 수도 없고 임차권등기명령이 최선이었다. 우리나라 법에서는 전세 계약 만료 후에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그제야 등기에 임차인의 권리를 올릴 수 있게 해 준다.
절차는 간단하고 역시 비용도 전세금 지키는 값으로는 싸다. 최근에 제도가 보완되어 절차도 간소화되고 소요 시간도 짧아졌다. 그래도 몇 주는 소요될 수 있으니 만약 임차권등기를 할 계획이라면 이사 나가기 한 달 전부터는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임차권등기명령으로 등기등재 후에 이사를 나가야, 전셋집 자물쇠가 뜯기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실제로 이사를 감행하기 전 인터넷 검색의 결과는 하나같이 '임차권등기명령은 필수'라는 충고였다. 그것이 최소한의 할 일이라는 식이었다. 그럼 임차권등기명령을 받아내면 만사형통인가? 아니다. 생각해 보자. 애초에 이 사달이 난 건, 임대인에게 내줄 보증금이 없어서였다. 그럼 그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새로운 세입자다.
그럼 그 세입자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뭘까? 그 역시 보증금이 최우선이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몇 번이고 스스로 묻는다. 내 보증금 제때 잘 돌려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전셋집에 임차권등기가 되어 있다? 모두가 임차권등기를 한다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뻔히 전세금 미반환의 낙인이라는 걸 아는데 마음이 편할까?
임차권등기명령을 받으면 권리가 명확해지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소송과 한 걸음 가까워진다. 결국 이사 나오면서 임대인과 합의했다, '두 달 기한으로 해결이 나지 않으면 그때가서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겠다'라고. (구)전셋집의 관리비는 면제받았고 공과금은 내가 내기로 했다. 전세보증금 이자를 요구했어야 했으나 한번 또 참았다. 나는 세입자였고 소송은 피할 생각이었고 임대인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꽤 큰 돈을 손해 봤다. 추가비용이다. 전세금이 창출할 수 있는 이자, 쓰지도 않은 공과금 지급.
임차권등기명령을 하는 수고는 유예되었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구)전셋집 관리. 짐을 빼니 아늑했던 집이 낡은 공간이 되었다. 흰 색이던 벽은 누렇게 떴고 낙서가 보인다. 화장실 문틀과 문짝은 썩어가고 싱크대는 낡아서 모서리가 터지기 직전이다.
집주인은 새로 도배하고 문틀을 교체하고 싱크대에 필름지를 시공했으니 돈이 꽤 들어갔을 터이다.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주택 관리 책임을 물을 수 있는데, 그 선이 명확하지 않아 다툼의 여지가 다분하다. 설마 보증금도 못 내주면서 이런 비용을 청구할까 싶지만,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임대인은 비용 청구를 하지는 않았다. 만약 해 온다면 그때는 보증금 이자를 달라고 할 셈이었다. 나도 카드를 하나 쥐고 있긴 하지만 자꾸만 공사 때문에 문을 열어주러 오가는 내내 혹시나 임대인이 공사비용을 제하고 보증금을 준다 하면 난 어떤 태도로 어떤 어휘를 써야 할지 고민했다. 돌아보면 쓸데없는 공상이었지만, 당시에는 꼭 해야만 하는 방어책이었다. 그렇게 내 평온과 시간이 좀먹었다.
세입자들이 치르는 비용에 대해 따져봐야
사실 그런 식으로 머리를 쓰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게 가장 힘들었다. 새로운 상황과 조언 앞에서 일상이 깨지고 멍하게 몇 시간이고 그 생각만 하다 보니 많은 걸 놓쳤다. 일상이 망가지니 자영업자인 내 수입이 나빠지는 건 당연했고, 언제나 생각의 끝은 후회였다. 자책 탓에 술도 늘어갔다.
추가로 놓친 것도 있었다. 건강보험. 나는 남고 가족은 새 월셋집으로 전출을 나갔더니 건강보험이 분리되었다. 나와 아내 모두 자영업자라 그렇다. 최근 일시적 세대 분리의 경우 추가부과는 지나치다는 국민권익위 의견이 있기도 했고 실제로 건강보험공단에서도 보완책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내 경우는 해당되지 않았다. 공단 직원분의 설명에 따르면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거나 행정절차 밟은 등의 심각 사유가 있어야만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또 십만 원쯤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이 골치 아프고 몸 상하는 돈고생은 얼마 전에야 끝이 났다. 그간의 고생 덕인지 임대인과는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합의를 했고, 전세금을 돌려받는 현장에서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잘된 일이다. 나로서는 잘된 일인데...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이런 평안을 찾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세입자들이 피해를 봐야 할까. 전세금 몸살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겪어야만 변화가 생기려나.
법도 의식도 바뀌어야하겠지만, 그에 앞서 과연 전세라는 제도가 은행 이자를 포기하는 소액의 비용으로 집을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전셋집에서 이사 나올 때마다 세입자들이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며 고생하고 있는지를 계산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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