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직면'으로 발칸반도 평화 일궈내는 사라예보 영화인들
[클레어함 기자]
▲ 보스니아 헤체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모습 1990년대 보스니아전쟁 중 사라예보 1425일 봉쇄기간 무려 1만 1541명이 희생되었다. 급하게 묘지가 필요했던 도시는 아이들이 놀던 공원들을 공동묘지로 전용하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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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25일!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던 시간이다. 정확하게는 1992년 4월 5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로 이는 현대사의 수도 봉쇄 중 최장기간으로 기록된다.
십만 명 사망, 3만 2000명 실종 추정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보스니아 전쟁은 보스니아가 1992년 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보이콧하고 도발로 여겼던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민병대(스릅스카 공화국군)와 세르비아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수도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악지대 주변 60km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100여 개가 넘는 골목에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총격해 1만 1541명이 희생되었다. 300여 명의 보스니아 군인과 엔지니어들이 현지인들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필수품, 시민군의 소형 무기를 외부에서 공급하기 위해 약 4개월에 거쳐 800미터에 달하는 지하터널(희망의 터널)을 1993년 7월 완공함으로써 장기간 저항을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약 4년간에 걸친 이 봉쇄기간의 마지막 단계였던 1995년 예술진흥단체 오발라아트센터는 사례예보영화제를 창립했다. 전쟁에서 꽃 피워낸 이 영화제는 침체된 시민들의 활기를 북돋워주고 시민사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탰다. 현재 영화제 행사가 집중된 시네플렉스 사라예보와 홀리데이 인 호텔은 1992년 대규모 반전집회가 열렸고 첫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전쟁 발발 30년이 지나는 이 시점에 사라예보영화제는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명실공히 동남유럽의 시네마를 포커스로 발칸반도를 대표하는 큰 국제영화제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제 공식통계에 의하면, 8월 11일~18일 열렸던 29회 사라예보영화제를 찾은 영화인들은 약 천 명이며 관객은 10만 명에 이른다. 무수한 노천 라이브 콘서트와 야외상영도 흥겨운 축제분위기를 북돋운다.
▲ 희망의 터널 박물관의 사진 전시 희망의 터널 박물관에서 한 현지 관광가이드가 사라예보 봉쇄 당시 예술형태의 저항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외출시 골목 곳곳에 포진한 세르비아계 저격병들의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처럼 일상을 즐기고 예술활동을 향유함으로써 저항정신을 보이려고 했다. 당시 대표적인 행사로는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콘서트, 미스 사라예보 콘테스트, 사라예보 영화제 등이 있었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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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부부 총격사건으로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기도 했던 사라예보는 2번의 세계대전과 아울러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최대 피해도시이기도 하다. 보스니아는 작은 영토 안에 무슬림, 크로아티아계 카톨릭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가 공존하는 민족과 종교 구성이 복잡한 사회다.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에 의해 현재 보스니아는 회교도와 카톨릭교가 주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과 정교가 주류인 스릅스카공화국,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져있다. 이런 끊임없는 무력분쟁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사라예보영화제는 유사한 규모의 국제영화제들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프로그램이 있다.
▲ 북마케도니아의 대표적 감독, 테오나 미테프스카의 신작 영화 포스터. 사라예보 영화제의 ‘전쟁 과거사 성찰(DWP: Dealing with the Past)' 프로그램에 소개된 북마케도니아 출신 테오나 미테프스카감독의 < The Happiest Man in the World > 포스터. 사라예보의 한 그룹데이트 행사에서 전쟁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는 우연한 만남을 그린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 사라예보영화제 페북페이지 |
2016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전쟁의 뿌리깊은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옛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국가들간의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화해 노력의 일환이다. 2019년부터는 '청소년의 시각(In Youth Eyes)'이라는 부대 프로그램을 고안해 서부 발칸지역의 청소년 30~50명을 영화제에 초청해 영화도 감상하고 워크숍을 진행해오고 있다.
특히 사라예보영화제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관해 제대로 연구된 역사적 사실이 영화와 TV 프로그램 제작 지원을 통해 대중과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오고 있다. '실화 마켓(TSM: True Stories Market)'이라고 불리는 이 플랫폼은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관련 신뢰할 만한 엔지오, 단체 및 개인의 연구자료를 해마다 4개의 프로젝트를 선정해 영화제 기간 발표한다. 그런 후 소개된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장편 분량의 영화제작에 관심이 있는 발칸반도 영화인 및 제작사들은 영화제에 자기 소개서 및 제안서를 제출하고 수개월의 심사절차를 거친다.
오픈콜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최종 선정된 현지 프로덕션사는 만 유로의 개발지원금을 받게 된다. 현재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지원금 만 유로와 청소년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고 기록해온 주체들과 영화인들을 연결하는 이 독특한 프로그램은 지역 주민들이 영화를 매개로 과거사를 공론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대화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데 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동남유럽지부(Southeast Europe Dialogue)의 디렉터인 랄프 멜처 박사 또한 24일 사라예보영화제와의 협력 취지를 묻는 필자에게 "영화의 힘을 이용해 지역 내 상호간 편견을 극복하고 비판적 사고를 장려하여 화해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답했다.
▲ ‘실화 마켓(TSM: True Stories Market)' 모습 왼쪽부터 발칸반도의 주요 탐사보도기관 네트워크인 BIRN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부 소속 라미야 그레보 기자, 레일라 가차니차, 크로아티아의 테나 페리신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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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의 주요 탐사보도기관 네트워크인 BIRN(Balkan Investigative Regional Reporting Network)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부는 올해 8회를 맞는 '실화 마켓' (TSM)에서 두 편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 단체의 발표를 요약하면,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피해자들에게 트리거가 되어 고독감, 악몽을 재현시키는 등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증세가 심해졌다. 즉 팬데믹 초기에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런 경험은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 때도 겪었던 기억을 재생시킨다는 점, 언론에서 보도되는 우크라이나 전쟁 참상의 이미지들은 과거 직접 겪었던 악몽같은 전쟁의 기억을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후군을 겪는 이들에 대한 공식통계도 없을 뿐더러 정부의 지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쟁이 야기한 물가상승은 또한 이미 최소한의 생계도 어려운 낮은 연금 생활자들의 생활고를 악화시키고 있다. 소수의 엔지오들의 지원에 의존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이 기관의 또 다른 프로젝트는 1992년 200여 명의 주민이 살해된 빌랴니(Biljani)대학살 이야기다.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이 가족과 작별하던 괴로운 기억에 대한 기록이다.
감동적인 실화도 있다. 전쟁 중 파괴된 크로아티아의 리피크(Lipik) 보육원을 재건했던 한 의사, 마리차 토피치(Marica Topić)의 실화가 그것이다. 당시 파괴된 보육원을 탈출했던 아이들과 동갑내기인 그녀의 조카 다니엘 토피치는 당시 이모의 행적을 찾아나서는 개인적인 여행을 나선다. 이 과정에서 당시 직원들과 고아들의 현재 모습을 접하며 어린이들을 위한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논하려고자 하는 것이 발표자들의 취지다. 이 자료를 소개한 크로아티아의 테나 페리신 교수는 자신의 차고에서 우연히 옛 사진들을 발견한 것에 영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역사적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 과거의 전쟁범죄로 아직까지 고통을 겪는 북부 도시 바냐루카 주민들의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바냐루카는 보스니아 제2의 도시로 세르비아계가 절대 다수인 스릅스카공화국의 사실상의 수도다. '레드 밴(Red Van)'이라는 제목의 연구자료를 제시한 레일라 가차니차씨의 발표에 의하면, 바냐루카는 1990년대 전쟁 당시 평화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장례식 승합차로 이용되던 빨간 승합차를 몰던 일단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모슬림과 크로아티아인들 같은 비세르비아계, 본인들의 사상과 다른 세르비아인들을 납치해 구타, 고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일부는 행방불명되기도 하는 등 지역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 희망의 터널 박물관의 전시 풍경 사라예보 시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필수품, 시민군의 소형 무기를 외부에서 공급하기위해 300여 명의 군인과 엔지니어들이 800미터에 달하는 지하터널(‘희망의 터널')을 1993년 7월 완공해냈다. 10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출입을 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이 중 국경지역의 대학살을 피해 온 난민도 일부 포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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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의 이런 과거사 화해 노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PTSD 연구사례를 발표했던 라미야 그레보(Lamija Grebo) 기자는 BIRN 보스니아 지부에서 보스니아 전쟁 연구 및 법정 모니터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는 22일 필자와의 줌 인터뷰에서 이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수긍했다. 그레보 기자는 "영화제의 '전쟁의 과거 직면하기'와 '실화 마켓' 프로그램은 정말 중요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여러 영화 형태로 제작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이자 방식"이라며 "BIRN 보스니아 지부는 거의 매년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다양한 이야기와 아이디어들을 접하는 것은 항상 흥미롭다. 저는 올해 소개된 내용도 마음에 들었고 누군가가 꼭 이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소망을 피력했다. 또한 "우리는 대량학살과 전쟁 범죄를 부정하는 전후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다루는 것은 역사수정주의와 싸우는 방법이다. 사회 전체로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매년 12월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에서 열리는 지중해단편영화제(Passaggi d'Autore: intrecci mediterraneai)를 운영하기도 하는 보스니아 출신 영화감독 아도 하사노비치(Ado Hasanović)도 이런 영화제 프로그램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필자에게 "이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이고 영화제에도 중요한 일이다. 과거를 논하고 다루다 보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더 잘 알 수 있고, 그들의 우선순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사노비치 감독은 올 사라예보영화제에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민병대에 의해 무슬림 민간인 8372명이 도륙당했던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에 관한 단편 다큐 <서칭 포 저스티스(Searching For Justice)>를 선보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및 보스니아 법대생들이 대학살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정의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 또한 28년 전 발발한 이 대학살에서 가족을 잃은 피해 유족이다.
사라예보영화제에서 이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마샤 마르코비치(Maša Marković) 인더스트리 팀장에 의하면, 현재까지 모두 3개 프로젝트가 영화화되었으며 2편은 개발 단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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