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다 대륙에 관심, 한반도가 17세기에 놓친 것

김종성 2023. 8. 2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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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연인>

[김종성 기자]

MBC 사극 <연인>은 광해군 실각, 정묘호란, 병자호란, 명나라 멸망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17세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밑바탕을 이루던 두 가지 요소가 극적으로 변모하던 시대였다. <연인>은 그런 시대 변화를 음미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한무제(한나라 무제)의 활약을 계기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부터,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조선과 명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17세기까지, 동아시아 질서는 주로 3대 행위자에 의해 작동했다.

만리장성 바깥쪽의 유목민(혹은 반농반목민), 만리장성 안쪽의 중국 농경민과 그 동맹국들, 유구(오키나와)나 일본 같은 해양국가나 고려인 해적이나 왜구 같은 해적세력이 그 셋이었다. 셋 중에서 주도권은 주로 장성 안팎의 두 세력 사이에서 오고갔다.

일본이 7세기 후반에 백제부흥운동에 개입하고 14세기 중반 이후의 왜구나 그 이전의 한민족 해적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7세기 이전에도 해양세력은 대륙세력에 상당한 부담이 됐다.

지역 질서를 이끈 두 대륙세력
 
 MBC <연인> 관련 이미지.
ⓒ MBC
 
그렇지만, 지역 질서를 이끌어간 것은 장성 안팎의 두 대륙세력이었다. 장성 바깥의 흉노족·돌궐족·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이 번갈아 남하하며 장성 안쪽의 중국과 대결했다. 군사력이 앞서는 유목민과 경제력이 앞서는 중국 농경민이 지역 패권을 주고받았다. 그런 속에서 한민족은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독자 노선를 걷곤 했다.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 시작된 17세기는 그런 전통적 구도가 막을 내린 시기다. 얼마 전까지 여진족으로 불렸던 만주족이 두 차례 호란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고 1644년에는 명나라를 대체했다. 그러면서 나타난 양상이 장성 동북쪽과 중국 안쪽이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되는 일이었다.

고려 말인 1368년에 몽골족 원나라가 몽골초원으로 쫓겨간 뒤로 장성 북쪽은 동아시아 주요 행위자의 위상을 상실했다. 장성 서북쪽은 그 이전에 그것을 상실했다. 그래서 14세기 후반부터는 장성 동북쪽 여진족과 장성 안쪽의 명나라가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랬다가 1644년 명나라 멸망으로 장성 안쪽과 바깥쪽의 대결이 의미를 잃게 됐다. 두 권역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발생한 결과였다.

장성 동북쪽인 만주 평원이 중국 내륙과 통합된 일은 한민족 입장에서는 불리했다. 오랫동안 한민족의 무대였고 중국 내륙보다는 한반도와 더 긴밀했던 만주가 중국 내륙과 하나의 권역을 이루는 일이었다.

장성 안쪽과 만주가 별개 권역이었을 때는, 두 지역을 가르는 요하(랴오허)의 지정학적 의미가 훨씬 컸다. 수양제나 당태종 같은 중국 황제들은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이 강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그런데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하면서 요하의 의미가 달라졌다. 두 권역의 경계라는 의미가 현저히 약해졌다. 대신, 압록강의 지정학적 의미가 변했다. 만주와 한반도를 나누는 강이 중국 문명권과 한반도를 나누는 강으로 바뀌었다. 한반도 입장에서는 더욱 강력해진 중국의 힘을 직접적으로 맞닥트리게 된 것이다.

장성 안쪽과 바깥의 대결이 해소된 것은 대륙 내부의 갈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동아시아대륙이 해양을 향해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게 됐음을 뜻했다.

그것은 16세기 전반부터 불기 시작한 새로운 흐름과도 부합했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의 활약으로 16세기 초반에 전 세계 바닷길이 '초연결' 현상을 보이면서 유럽 내부의 비주류였던 서유럽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동유럽이나 남동유럽은 중동 및 동아시아와 육로로 혹은 가까이 교류할 수 있었지만, 서유럽은 거리가 멀어 그런 교류에서 소외돼 있었다. 그래서 낙후됐던 서유럽이 바닷길을 통해 아프리카를 돌아 동아시아까지 가게 되면서 서유럽이 급격히 강해졌다.

이는 동아시아 해양국가인 일본이 바닷길을 통해 서유럽과 연결되고 문화적 충격을 받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조선에서 한석봉이 출생한 1543년에 동남아를 방문한 포르투갈 선박이 태풍에 휩쓸려 규슈섬 남쪽에 표류하고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 조총이 일본에 전해졌다. 이것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의 판세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반도와 중국에 밀려 동아시아의 비주류로 내몰렸던 일본이 조선과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을 7년이나 끌었다. 대륙세력에 밀리던 동아시아 해양권이 바닷길을 통해 세계 여타 지역과 '링크'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처럼 1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장성 안쪽과 바깥의 대결이 해소되는 한편, 대륙세력보다 열세였던 해양세력이 급성장하는 두 개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조선과 청나라 같은 대륙국가들은 그 둘에 대한 관심을 균형 있게 안배하지 못했다.

대륙국가들은 중국 내륙과 만주가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여진족의 급상승과 남하를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드라마 <연인>의 등장인물들처럼 당시의 대륙 사람들은 대륙 내의 전통적인 구도가 해소되는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해양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기운
 
 MBC <연인> 관련 이미지.
ⓒ MBC
 
  MBC <연인> 관련 이미지.
ⓒ MBC
 
그러나 해양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기운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했다. 임진왜란 뒤에 일본군이 돌아갔다는 점에만 주목했을 뿐, 그렇게 돌아간 일본이 그 뒤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이 임진왜란 때 확보한 도자기 기술 등을 바탕으로 저 멀리 유럽과도 교류하면서 급격히 힘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조선 선비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새로운 중화가 됐다며 만주족을 여전히 경원시했다. 청나라의 힘에 눌려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드는 한편, 북벌론을 통해 만주족에 대한 복수의 의지를 표출했다. 이는 조선 선비들의 의식을 중국대륙에 묶어놓는 기능을 했다. 선비들이 일본을 돌아볼 기회가 차단됐던 것이다.

청나라 쪽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선과 더불어 청나라도 해금정책을 펼치며 해양 활동을 억제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보다 인구도 훨씬 적고 경제력도 약한 상태에서 중국을 정복했다. 그래서 중국을 관리하는 일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다. 장성 동북쪽에 있다가 그 안쪽으로 들어간 뒤라, 장성 사방을 두루 경계하는 일도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다.

<연인>에서도 묘사되듯이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 당국자들은 조선 조정 앞에서 굉장한 위세를 부렸다. 그랬던 그들이 막상 중국을 정복한 뒤에는 태도를 확 바꾸었다. 병자호란 때의 일을 잊기라도 한 듯이 조선을 상당히 유화적으로 대했다. 조선 말고도 상대해야 할 국가들이 많아진 데 따른 결과였다.

중국대륙을 관리하는 일에서 청나라는 명나라보다 훨씬 큰 부담을 감수했다. 이는 청나라가 대륙 문제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서유럽이 바닷길을 통해 세계 각지로 진출하고 그 여파로 일본이 급성장하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청나라의 관심은 바다보다는 대륙에 묶여 있었다.

시선이 대륙에 고정된 조선과 청나라가 급성장하는 일본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은 19세기에 동아시아대륙이 서양과 일본에 시달리며 수난을 겪는 원인이 됐다. 대륙에만 주목하고 일본에는 주목하지 못해서 생긴 이때의 상처는 2023년 지금까지도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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