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된다고 떼라도 쓰면 좋으련만, 세 딸에게 고맙고 미안해"

완도신문 유영인 2023. 8. 2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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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김영숙 해녀

[완도신문 유영인]

ⓒ 완도신문
"오매매 사진 찍는 줄 알었으면 머리에 물이라도 묻히고 올 것인데."

제주도 성산읍 시흥리가 고향인 김영숙 해녀가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 화장을 안 했다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스물두 살 때 고향 친구가 육지에 물질을 가자고 꼬시는 거야. 그때 수영을 할 줄 알아도 남들처럼 잘하지는 못했거든. 물질하는 기술은 없는데 수영을 잘해 겁도 없이 친구를 따라나섰어."

이렇게 시작된 김 해녀의 물질은 오늘날까지 47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첫 원정 물질은 완도의 대모도(大茅島)로 왔다.

"처음 모도로 와서 갓물질을 시작했어. 내가 물질을 시작할 때 고무옷(슈트)이 나와서 소중이를 입은 해녀는 없었어. 고무옷을 입으니 물질하는 것을 자주 봐서 갓 물질을 쉽게 하겠더라고, 물질을 마치고 늦가을에 제주로 도로 갔지."

결혼은 연애결혼을 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때 성산읍사무소에 근무했는데 곱상하니 예쁘게 생겼었어. 나도 울산에 살다가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본적지(성산읍)로 갔어. 그때 남편을 읍사무소에서 처음 봤어.

우리 집안은 사촌 형제가 많은데 그때 엄마가 울산에 계시면서 사촌들 애경사 심부름은 꼭 나한테 시켰지. 엄마 심부름을 다니다가 우연히 둘이 눈이 맞아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 집에선 죽어도 결혼은 안된다는 거야."   이유인즉, 신랑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것, 거기에 곱상하게 생겨 거친 일도 못 하고 나만 고생시킬까 봐 그런다고. 그래서 내가 형제들에게 폭탄선언을 했어. 결혼을 못 할 바에는 차라리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되겠다고. 집에서 난리가 났는데, 아무튼 연애할 때 시끌벅적했어. 우여곡절 끝에 신랑이 일방적으로 약혼식을 준비하여 약혼하고 24살에 결혼했어."

남편 살리려 다 버리고 가인리에 터 잡아
 
ⓒ 완도신문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을 때, 신랑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랑의 친한 친구가 죽었어. 그때 남편이 슬픔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제사상을 엎어버리고 친구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품고 잠이 들어 버렸죠.   

그 후로 신랑이 아프기 시작했고 읍사무소도 휴직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스님이 지나가다 집에 들러서 당장 뭍으로 나가서 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이 죽는다고. 겁이 덜컥 나 아무것도 안 가지고 딸이랑 남편이랑 몸만 빠져나와서 신지면 가인리에 터를 잡았어."

가인리에 터를 잡고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남편은 그곳에서 닭과 개를 농장식으로 키우고 나는 물질을 해서 돈을 벌었어. 그런데 경험이 부족하여 신랑 사업이 잘 안됐어. 돈은 안됐지만 2~3년 정도 지나자 남편의 건강이 눈에 보이게 좋아졌어. 그 사이 애들이 두 명이나 태어났어."

신랑의 건강은 김 해녀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서 좋아졌다고 한다.

"백삼(해삼의 한 종류로 몸 전체가 하얀색)이 좋다 해서 백삼이 있으면 돈 생각 안 하고 사서 남편을 먹였어. 또 물질을 하는 날이면 그날 잡은 제일 큰 전복을 죽으로 쒀서 남편에게 무조건 먹게 했어."

30대 때는 난바르(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특정 지역을 배로 이동하여 배에서 먹고 자며 일주일 정도 지속적으로 하는 물질)도 많이 다녔다고 한다. 

"횡간도(완도) 득량만(보성) 진도는 바다를 사서도 물질을 했지만 안 다녀본 섬이 없어요. 남편은 신지에서 애들과 함께 있고 나는 난바르를 다니고, 보길도나 노화도 쪽 해녀배들은 커서 배에서 숙식을 했지만 우리는 배가 적어서 진도 성등포에서 여관을 얻어 숙박했어요."

해녀 사업도 여러 군데 했다고 한다.

″해녀 사업은 몇 군데서 했어요. 기억에 남는 곳은 진도읍. 남편 친구 누나와 공동으로 바다를 사 작업을 하는데 하루는 전복을 큰 광주리로 하나를 땄(잡았)어요. 아마 60~70kg는 됐을 겁니다."

그 후로는 그런 작업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김 해녀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3명이 공동으로 작업을 했는데 지금은 혼자 한다고 한다.

″3년 전까지 3명이 했는데 한 분은 은퇴하고, 한 분은 제주도로 돌아갔어요. 지금은 혼자서 하는 데 남편의 힘이 커요. 물때에 맞춰서 차량을 운행해 주고 온갖 잡일을 해 줘요. 요즘은 진도로 물질을 가도 차량을 이용하니까 물때에 맞추느라 잠을 못 잘 때가 많아요."      

"엄마 손 필요할 때... 애들에게 한 없이 미안"
 
ⓒ 완도신문
"혼자 작업을 하니 배를 안 타고 작업하는 곳을 주로 합니다. 여름철에는 전복 작업이 힘들어요. 수온이 조금만 높아도 전복이 시원한 바위 밑으로 숨어 버리거든요. 그러면 전복이 있을 만한 바위를 뒤집어서 전복을 따는데 여러 번 하다 보면 어깨가 아파요." 

김 해녀는 불가사리 구제작업을 스스로 한다고 한다.

"거의 10년 전부터 불가사리 구제작업을 스스로 하고 있는데 매번 물질을 할 때면 불가사리망을 별도로 가지고 들어가서 물질에 문제가 없으면 불가사리를 보이는 대로 주워 담어요. 불가사리는 바닷속의 전복, 성게, 패류 등 안 먹는 게 없어요."

김 해녀는 슬하에 딸 셋을 두었는데 모두 훌륭하게 자라나 자랑스럽고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편으론 애들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한다.

"딸만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공무원이고, 둘째 딸은 대전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어요. 셋째딸도 공무원이었는데 결혼을 하고서 손주를 연년생으로 낳은 후 사표를 냈어요. 엄마로서 애들에게 엄마 손이 필요할 때 애들을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해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애들에게 한 없이 미안해요.

물질이나 난바르를 가면 첫째와 둘째는 동네 할머니들이 키워 주다시피 했어요. 그때는 시골의 정도 있어서 수고비를 조금만 드려도 가능했고 오히려 무슨 돈이냐며 사양했어요. 그러면 물질에서 얻은 갯것을 드리기도 했고. 

첫째 딸이 박사 공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생들도 공부시켜야 하잖아요, 그래서 딸에게 박사를 포기하라고 했어요. 차라리 엄마에게 절대 안 된다고 투정을 부리면 괜찮을 건데, 한마디 대꾸도 없이 엄마의 뜻을 헤아려서 공부를 포기한 겁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큰 딸에게 빚을 진 생각이 들어요.

둘째딸은 변호사가 돼 첫 월급을 받았는데 일원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엄마에게 선물이라며 가져왔어요. 가슴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로도 매달 돈을 보낸다고 했는데 제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서 받지 않고 있어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어께와 다리가 조금 아프다는 김 해녀는 지금처럼만 평범하게 행복한 나날을 살면 좋겠다며 내일 시간 늦지 않게 현장으로 와서 사진을 찍으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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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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