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공산당 창당 전 마오쩌둥 “후난 자치 공화국 세우자”
‘하나의 중국’ 이데올로기
지금은 그 충격이 많이 가라앉았다. 아잘 가트는 『민족: 긴 역사와 깊은 뿌리』(2013)에서 ‘부적절한 2분법(fake dichotomy)’ 문제를 되풀이해서 지적한다. ‘종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다양한 모습으로 정치에 이용돼 온 관념으로, 존재-비존재의 2분법으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 민족주의가 새로 ‘발명’되고 ‘상상’되기보다 ‘재발명’되고 ‘재상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러 시대 여러 사회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던 종족 의식이 19세기에 세계를 휩쓰는 유별난 힘을 갖게 된 사정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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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까지 ‘연방주의’ 목소리
지역마다 문화·경제 조건 큰 차이
국공합작으로 사라진 ‘제3의 길’
연방 지지한 군벌을 배신자 몰아
홍콩 ‘일국양제’ 정책에 흔적 남아
초거대국가 중국은 어디로 갈까
」
19세기 세계를 휩쓴 민족주의
근대세계에서 민족주의가 큰 힘을 쓴 것은 민족국가의 역할 때문이다. 민족국가란 민족의 범주와 국가의 범주를 일치시키는 관념이다. 모든 구성원이 단일민족인 국가는 현실에 없다. 중심민족 외의 구성원들이 국가 정체성에서 소외되는 것이 민족국가다.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유럽에 새로운 국제체제가 세워진 후 국가 간 경쟁에서 민족국가가 유리한 국가 형태로 떠올랐기에 민족국가의 출발점을 여기서 찾기도 하지만, 민족국가는 한마디로 19세기 현상이었다. 민족국가 선두 주자의 하나인 프랑스에서도 대혁명(1789) 당시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전체의 절반에 불과했다고 홉스봄은 지적했다.
19세기 민족주의 발전의 배경은 산업혁명이었다. 인구 대다수가 농촌에 살고 생활양식에 변화가 적던 시기에는 문화통합의 필요도 크지 않았다.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고, 군대 등 국가동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문화통합을 통해 중심민족이 세워졌다고 홉스봄·겔너·앤더슨 등 ‘근대주의자(modernist)’들은 설명한다.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들은 19세기 민족주의의 특이한 양상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전 전통과의 연속성을 중시한다.
19세기 후반에 동아시아인이 선망한 민족국가는 유럽에서도 최신 유행품이었다. 가장 앞선 영국과 프랑스도 19세기 초에야 민족국가 성격이 확실해졌고,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1870년대에 세워졌다. 1810년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이 유럽 민족주의를 자극한 것을 중시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신제국주의’ 시대는 ‘제국 해체’ 시대
아편전쟁(1839~1842)을 계기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의식이 동아시아 각국에 일어났으나 대응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성공과 중국의 실패가 두드러진다. 일본이 근대국가 건설을 서두르는 동안 청나라는 기술 도입 차원의 ‘중흥(中興)’정책에 머물러 있다가 청일전쟁(1894~1895) 패배 후에야 국가체제 변화를 바라보는 ‘변법(變法)’의 목표가 떠올랐다.
성패의 원인으로 위기의식의 깊이 차이를 흔히 지적하는데, 그에 앞서 국가체제의 상태에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청나라 제국 체제가 굳건했던 반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幕府) 체제는 한계에 이르러 새로운 국가체제 모색에 저항이 적었다.
일본에 유리했던 조건 또 하나는 ‘민족’ 문제가 단순했다는 점이다. 영토와 인민이 수십 개 항(藩)으로 쪼개져 있어도 언어·문화는 통합돼 있어서 간단한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 조치로 바로 민족국가가 만들어졌다. 민족국가 수립은 근대화 개혁을 쉽게 해주고 국가 동원력을 강화해주는 조건이 됐다.
19세기 후반에 궁지에 몰린 다민족 제국은 중국만이 아니었다. 영국(동인도회사)의 압박에 몰린 무굴 제국은 세포이 항쟁(1857)을 계기로 무너졌고, 오스만 제국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유럽에서도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세기 말의 신흥 제국은 진짜 ‘제국’이 아니었다. 기술 발달의 지역적 차등에 따라 특정 지역의 몇 개 세력이 전 세계를 쪼개 가지면서 종래의 제국과 맞먹는 규모의 통치 지역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군사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의 확장에 비해 사회·문화적 통합 효과는 미미했다. ‘신제국주의’ 시대는 민족국가에 의한 ‘제국 해체’의 시대였다.
2000년 제국 역사, 한족의 복잡성
청일전쟁의 충격으로 국가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중국 지도층에서도 널리 인식하게 되었으나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2000년간 자리 잡은 제국 체제의 관성이고, 또 하나는 통일된 근대국가를 만들기 힘든 구조적 복잡성이었다.
중국의 구조적 복잡성은 소수민족 관계보다 중심민족인 한족(漢族) 자체의 복잡성에 더 큰 문제가 있다. 한족은 긴 역사를 통해 제국에 편입되어 중화문명을 받아들인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지역에 따른 문화와 경제조건의 차이도 크다.
각 지역 주민은 국가에 앞서 자기 지역에 소속감과 충성심을 가진다. 지리·역사적 조건이 차이가 큰 만큼 지역 간 이해관계도 크게 엇갈린다. 지금도 신장·티베트 등지의 소수민족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타이완·홍콩 등을 둘러싼 한족 내부 문제다.
중국이 총체적 혼란에 빠졌을 때는 일부 지역이라도 붕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자립하고, 자립한 지역들의 자발적 연대로 중국을 재건하자는 연방주의가 애국자들 사이에 유행했다. 마오쩌둥도 공산당 창당 전인 1920년 ‘후난(湖南)공화국’을 제창한 일이 있다.
“9년간의 거짓 공화정과 전란을 통해 사람들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 후난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도는 후난의 자결자치(自決自治), 곧 후난 사람들이 후난 지역에 하나의 ‘후난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함께 주장해 온 ‘하나의 중국’이 근대국가 건설의 톱-다운 방식이라면 작은 단위부터 민주적 조직을 시작하자는 연방주의는 바텀-업 방식이었다. 1920년대까지도 연방주의는 ‘신(新)중국’을 향한 유력한 제안이었다. 유력한 제안이었기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목소리를 합쳐 분열주의로 매도한 것이다.
국공합작으로 매장된 혁명가 첸중밍
분열주의를 상징한 존재가 군벌이었다. ‘군벌’이라면 자기 패권을 위해 국가 대세를 외면한 이기적 존재가 떠오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중국의 장래를 위해 양심적으로 노력한 군벌도 있었다. 프라센지트 두아라는 20세기 초 중국의 민족 담론 과잉을 비평한 『민족으로부터 역사 건져내기』(1995)에서 첸중밍(陳炯明, 1878~1933)을 그런 인물로 그린다.
선비의 길을 걷던 첸중밍은 과거제 폐지(1905) 후 법률을 공부하고 광둥성 자의국(諮議局)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신해혁명(1911) 직후 동맹회(同盟會)로부터 임무를 받아 기율이 엄정하고 전투력이 강한 군대를 조직해서 국민당의 핵심 군사력으로 키워냈다. 쑨원이 비상대총통 취임(1921) 후 이미 광둥성장과 광둥군 총사령을 겸하고 있던 첸에게 혁명정부 육군부장과 내무부장을 더 겸임시킨 데서 그 절대적 신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신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2년 4월 육군부장 외의 모든 직함에서 사퇴하고, 두 달 후 쑨원 체포를 시도한 ‘6·16 병변(兵變)’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
쑨원은 첸중밍에 대해 극심한 배신감을 토로했지만, 첸의 ‘배신’은 이득이 아니라 원칙을 위한 것이었다. 첸은 처음부터 ‘연성자치(聯省自治)’를 제창하며 쑨원의 ‘북벌(北伐)’에 반대했다. 부도덕한 군벌과 결탁해 전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우페이푸(吳佩孚, 1874~1939) 같은 양심적 군벌과 협력하며 서서히 혁명을 추진하자는 주장이었다.
첸중밍은 쑨원을 배신한 데다가 국공합작 반대로 공산당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그의 역사적 매장은 국공합작으로 이뤄졌고, 연방주의와의 합장(合葬)이었다. 두아라는 첸중밍의 발굴을 통해 근대중국의 연방주의 전통을 함께 발굴하려 한 것이다.
연방주의의 잠재적 가치는 지금의 중국에도 살아있다. 일국양제(一國兩制) 노선에 이 가치가 깔려 있다. 홍콩과 타이완을 구슬리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초거대국가의 부담과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발전이 필요한 노선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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