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푸틴의 오른팔’ 프리고진…“반란죄, 공개처형된 것”

박형수, 박소영 2023. 8. 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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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탄 전용기가 23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인근 쿠젠키노 마을 근처에서 추락했다. 친바그너 텔레그램은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AFP=연합뉴스]

‘푸틴 오른팔’로 불렸던 러시아 민간용병 기업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62)이 의문의 전용기 추락 사고로 숨지자 파이낸셜타임스(FT)는 “크렘린궁이 ‘지연된 복수’를 실행해 결국 영화 ‘대부’ 같은 결말을 냈다”고 전했다. 영화 속 마피아가 상대를 죽이기 전 극적으로 용서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듯,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무장 반란을 일으킨 프리고진에 대한 처벌을 미루다 두 달 만에 충격적인 ‘공개 처형’을 감행했단 의미다.

23일(현지시간) 항로 추적 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프리고진 소유 엠브라에르 레거시 제트기가 3만 피트(9144m) 상공까지 상승했다가 비행 30분이 채 안 돼 모스크바 근처 트베리 지역 쿠젠키노 근처에서 갑자기 추락했다. 러시아 항공청은 승무원 3명을 포함한 탑승객 10명 전원이 숨졌다고 밝혔다. 인테르팍스통신은 시신 10구 모두 수습됐으며, 유전자 분석을 통해 탑승객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탑승객 명단엔 프리고진이 올라 있었고, 사고 현장에선 그의 휴대전화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FT “크렘린궁, 영화 대부 같은 결말 내”

관계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사고 직후 친(親)바그너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은 프리고진이 탄 비행기가 러시아군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날 목격자들은 공중에서 두 번의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고 전했다. 소셜미디어에는 미사일 흔적처럼 보이는 장면과 한쪽 날개가 없는 비행기가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익명의 러시아 소식통은 언론에 프리고진 전용기가 한 개 이상의 지대공미사일에 의해 격추됐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만약 프리고진의 비행기가 고의로 격추됐다면 이는 푸틴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 인물에 대한 공개처형”이라고 해석했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 책임자인 키릴로 부다노프는 “지난 6월 (반란 이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반란범을 암살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며 ‘고의 격추’라는 그레이존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일각에선 단순 사고라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모스크바와 그 주변 지역에 수차례 드론 공격을 감행하면서 해당 지역 방공망이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 방공망이 제트기를 드론으로 혼동할 가능성은 극히 작다”며 사고 가능성을 일축했다. 로이터통신은 프리고진의 비행기가 추락 직전까지 아무런 결함이나 사고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그너센터 앞 임시 추모 공간. [AFP=연합뉴스]

프리고진이 죽은 것처럼 위장했을 뿐 실제로는 살아 있다는 등 확인할 수 없는 추측과 음모론도 떠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추락 사고는 러시아 군부 실력자인 세르게이 수로비킨이 항공우주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된 지 하루 만에 일어났다. 수로비킨은 프리고진과 친밀한 사이로, 지난 6월 프리고진의 반란을 도왔거나 최소한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란 의심을 받아왔다. 현재는 가택 연금 중이다.

프리고진(左), 푸틴(右)

수로비킨과 프리고진이 연달아 제거되자 푸틴의 ‘반란 숙청 작업’이 본격화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리고리 유딘 모스크바 사회경제대 정치철학과 교수는 FT에 “지난 두 달은 반란에 대한 크렘린궁의 내부 조사 기간이었다”면서 “조사 결과 수로비킨은 해고, 범인(프리고진)은 처형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비행기에는 프리고진의 오른팔이자 바그너그룹 지휘관인 드미트리 우트킨이 함께 탔다.

미국 싱크탱크 대서양협의회는 “프리고진의 죽음은 푸틴 정권 유지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푸틴 정권은 본질적으로 대중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운영되는데, 프리고진의 반란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면 정권 기반이 심각하게 약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렘린궁 고위 관리는 FT에 “반역죄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분명한 신호를 러시아 엘리트 전체를 향해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내년 선거를 앞두고 푸틴이 여전히 러시아에 강력한 통제권을 쥐고 있단 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려는 움직임이라고 WSJ는 분석했다.

추락사 보고받은 바이든 “놀랍지 않다”

김주원 기자

과거 푸틴 정적들이 대부분 화학신경 작용제 노비초크 등으로 독살되거나 총살됐던 것과 달리 ‘비행기 격추’라는 방식이 사용된 것도 러시아 엘리트에게 푸틴에 대한 도전은 곧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만 프리고진이 수사와 재판 등 법적 절차 없이 죽음을 맞은 것은 러시아가 정상 국가가 아니며 푸틴 대통령 개인의 변덕에 의해 움직이는 마피아 같은 조직이란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신재민 기자

이날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접경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투 승리 80주년 기념식에 참석 중이었다. 폴리티코는 푸틴 대통령이 사고에 대한 언급 없이 활짝 웃으며 개회사를 했다고 전했다.

휴가차 네바다주 타호 호수에 머물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비행기 추락 사고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백악관은 밝혔다. 바이든은 기자들에게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놀랍지 않다”며 “일전에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무엇을 탈 때 항상 조심할 것’이라고 말했었다”고 상기했다.

박형수·박소영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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