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수익률 깨워라… ETF로 직접 분산 투자해보세요
40대 후반 직장인 양지선 씨(가명)는 최근 IRP(개인형 퇴직연금) 계좌가 있는 한국투자 퇴직연금 앱인 ‘MY연금’을 자주 열어본다. 5000만원까지 쌓인 IRP 계좌에서 금융상품을 직접 고르기 위해서다. 그는 인공지능(AI) 시장 확대를 고려해 지난 6월부터 ‘타임폴리오글로벌AI인공지능액티브ETF’를 잇따라 사고 있다.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듯, ETF(상장지수펀드) 시세를 보며 꾸준히 매수하는 식이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 국고채 10년 ETF에 대거 투자했다. 10년물 국고채 금리가 4%대까지 오른 상황에서 채권 ETF에 투자하는 게 합리적인 투자라고 판단했다. 현 금리 수준을 누려도 좋고, 금리가 떨어진다면 채권 가격 상승까지 노릴 수 있어서다. 아울러 양 씨는 배당수익을 염두에 두고 ‘미국배당다우존스’ ETF도 샀다.
양 씨가 적극적으로 운용에 나선 이유가 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퇴직연금 계좌에 쌓인 자금을 직접 ‘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10년 전 금융사 영업사원이 권유했던 상품에 넣어둔 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해당 상품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이자만 주는 원금 보장형이었다. 그는 “만약 주식 비중이 높은 상품에 돈을 넣었더라면 코로나19 국면에서의 초강세장에서 수익이 많이 났을 것”이라며 “늦었지만 나에게 맞는 증권사로 이전해 모바일 앱으로 상품을 직접 고르고 있다”고 했다.
만기 이후 방치하는 상품 없애
최근 퇴직연금 자금 운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지난 7월 12일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다. 퇴직연금은 대표적인 근로자의 노후 안전판 자금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수익률은 ‘쥐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총 적립금의 90% 이상 원리금 보장 상품에 매여 있어서다. 문제는 가입자도 퇴직연금을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사실. 정부와 금융당국이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이유다.
디폴트옵션은 ‘처음부터 설정된 기본값’이라는 의미다. 이 말대로 근로자가 본인의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할 금융상품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퇴직연금 사업자(증권·은행·보험사)가 사전에 지정해둔 상품으로 적립금을 자동 투자한다. 방치되는 돈을 최소화하고 수익률을 높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퇴직연금은 회사가 근로자의 퇴직 시 지급할 퇴직금을 금융사에 적립하고 퇴직 시 근로자가 이를 수령하는 제도다. 크게 확정급여형(DB형), 확정기여형(DC형), IRP로 나뉜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직접 적립금을 운용하는 DC형과 IRP에만 적용되고 DB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디폴트옵션 운용 상품은 투자 위험에 따라 4가지 위험 그룹으로 나뉜다. ▲원금 보존을 중시하는 초저위험 상품(정기예금 등 100%) ▲투자 손실에 민감한 저위험 상품(펀드 40%와 예금 등 60%) ▲우수한 장기 성과를 중시하는 중위험 상품(펀드 70%와 예금 등 30%)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거나 장기 투자 목적의 고위험 상품(펀드 100%) 등이다. 디폴트옵션 상품은 퇴직연금 사업자별로 7개에서 10개까지 제공한다. 원리금보장상품으로는 예금과 이율보증보험(GIC)이, 펀드로는 타깃데이트펀드(TDF), 밸런스드펀드(BF), 스테이블밸류펀드(SVF), 사회간접자본펀드(SOC)가 승인받았다.
디폴트옵션은 만기가 있는 상품에만 적용된다는 점이 포인트다. 예컨대 퇴직연금 가입자가 2000만원은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3000만원은 펀드로 운용한다면 만기가 있는 원리금 보장 상품 2000만원의 적립금만 해당된다. 만기 뒤 6주간 운용 지시가 없을 경우 디폴트옵션이 적용되며 만기가 없는 펀드에는 디폴트옵션이 적용되지 않는다.
기존 상품의 만기가 됐을 때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은 채 6주가 지나면 미리 설정해둔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변경된다. 가입자가 원하면 6주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디폴트옵션으로 운용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디폴트옵션으로 운용 중인 상품을 가입자가 원하면 언제든 일반 상품으로 바꿀 수 있다. 이를 ‘옵트아웃(Opt-out)’이라고 한다. 옵트아웃이 필요하면 별도 의사표시 없이 디폴트옵션 상품을 매도하고 교체하고자 하는 다른 상품을 매수하면 된다. 디폴트옵션 상품을 고를 때는 고용부 홈페이지나 금감원 통합연금포털 사이트에서 상품별 운용 실적을 비교해보고 선택하는 것이 좋다.
공격 투자자라면 직접 운용 가능
ETF 시장 커지며 매수·매도 활발
또 한 가지 기억해둬야 할 게 있다. 원리금 보장 상품을 이용하던 퇴직연금 가입자는 앞으로 만기가 돌아와도 더 이상 같은 상품으로 자동 재예치가 되지 않는다. 디폴트옵션 시행으로 기존 원리금 보장 상품 자동 재예치 제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기가 지난 원리금 보장 상품에 대해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거나 사전에 디폴트옵션을 지정하지 않은 경우 만기금은 투자되지 않는 대기성 자금으로 남게 된다. 대기성 자금으로 운용되면 운용수익률이 낮아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디폴트옵션은 여전히 ‘방어적’인 운용에 가깝다. 대기성 자금을 방치하는 수준에 그쳐서다. 최근 개인 투자자의 주식 투자 비율이 높아지며 퇴직연금 상품을 직접 고르는 공격적인 투자자가 적지 않다. 방법은 간단하다. 증권사 모바일 앱에서 상품을 고르고, 매수·매도 타이밍을 스스로 조절하면 된다. 특히 ETF 시장이 커지며 투자 대상이 다양해졌다는 점이 개인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ETF만으로도 충분히 분산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어서다. ETF는 펀드보다 매수와 매도가 편하고, 수수료가 저렴하다는 점에서도 인기다.
예를 들어 AI가 단기 테마로 부각됐다면 인공지능 ETF를 골라 포트폴리오를 짤 수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는 이미 올랐고 다음 종목으로 TSMC가 뜰 것 같다고 판단했다면, TSMC가 대거 포함된 ETF를 고르면 된다. 예를 들어 미래에셋자산운용 ‘TIGER TSMC밸류체인FACTSET ETF’는 TSMC 비중이 27%로 높다. ETF로 포트폴리오를 짠 뒤 목표 수익률에 도달하면 다시 다른 ETF로 교체해 주식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식이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자금이라고 무조건 보수적으로 관리할 이유는 없다”며 “바이오, AI, 2차전지, 국고채 등 ETF가 워낙 다채롭기 때문에 개인 투자 성향에 맞게 적극적으로 고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아직은 초위험 상품 우위…공격형은 증가세
다만 아직까지도 예·적금 위주 초저위험 상품군에 유입된 자금이 상당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6월 말까지 디폴트옵션에 가입한 200만여명 중 177만여명이 초저위험 상품에 투자했다. 적립금도 9393억원으로 전체의 85.2%를 차지했다. 저위험·중위험·고위험 상품에는 각각 9만여명(806억원), 8만여명(488억원), 6만여명(332억원)이 가입했다. 1~6월 수익률은 초저위험이 2.26%로 가장 낮았다. 저위험 4.23%, 중위험 6.09%, 고위험은 8.88%를 기록했다. 6개월간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고위험 상품 10개 가운데 8개가 증권사에서 나왔다. 수익률 면에서 증권사가 압도적이라는 인식이 퍼질수록 머니무브가 거세질 전망이다.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장은 “은행 예·적금 금리도 4%대로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초저위험 상품 가입 수요가 더 많았던 것 같다”면서도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며 직접 투자를 경험한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에, 퇴직연금 자금에 대해서도 좀 더 수익률이 높은 상품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3호 (2023.08.23~2023.08.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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