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슈퍼맨이 될 수 없었던 인간, 폭탄은 내면에서 터졌다
독사과 만들고 옛 연인 자살 이끈 '욕망' 핵무기 개발 동력
책임의식 갖고 수소폭탄 손 놓자 충성 의심, 보안등급 박탈
용기 있는 양심, 자부, 긍지, 심지어 사회 정의까지 꺾어버려
영화 '테넷(2020)'은 시간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으로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3차 세계대전을 막는 내용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에게서 디자인 형태주의,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에게서 지적인 면모와 맥거핀을 구했다. 후자는 파우스트를 닮은 인물이라서 모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1932년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의 연구소에서 파우스트를 모방한 작품을 공연한 적도 있다.
파우스트는 지식과 권력, 개인적 성취를 앞세우는 인물이다.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오펜하이머도 비슷하게 물리학자, 교수, 전쟁 프로젝트 수장, 정책 수립자로서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어떤 것도 진짜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진 못한다. 예컨대 그는 전후 목적이 다른 정부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핵기술을 향한 양가적 감정을 숨기진 않았다. "물리학자들은 원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는 천박함, 유머, 과장으로도 없앨 수 없는 사실이죠. 그들이 상실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배우 로버트 패틴슨은 '테넷' 쫑파티에서 놀런 감독에게 위 문장이 담긴 오펜하이머 연설문 선집을 선물했다. 완독한 놀런 감독은 영화평론가 톰 숀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읽어보면 으스스합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촉발한 이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었으니까요. 핵폭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핵폭탄은 지독히도 가공할 만한 책임을 빚어냅니다. 그 지식이 세상에 일단 퍼지고 나면, 우리는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짜낸 치약을 튜브로 다시 넣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는 영화 '오페하이머'를 연출했다. 플롯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과학자·정치인·인간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두 번째는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면서 자기를 공공의 지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경로다. 전자의 제목은 '파우스트'라고 붙여도 무방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욕망이 주를 이룬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케임브리지에서 3년 선배인 패트릭 블랙켓(제임스 드라시)의 책상 위에 '독약 넣은 사과'를 놓는다. 자기보다 일찍 성공해 강단에 오른 걸 질투한다. 욕정에 사로잡혀 옛 연인 진 태틀록(플로렌스 퓨)을 자살에 이르게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은 핵무기 개발의 동력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미국과 영국의 수재들을 로스앨러모스로 불러들인다. 효율적 리더십을 발휘해 핵무기 제작 임무를 완수한다. 실제로 함께 작업한 과학자들은 "로스앨러모스에서 이뤄낸 공의 대부분은 오펜하이머로 인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오펜하이머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로스앨러모스는 필요한 성과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고, 열정 없이 일했을 것이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한스 베테)."
후자는 미국원자력위원회(AEC) 청문회가 주된 내용이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과 그 사용에 일조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한다. 그래서 수소폭탄 제작 프로젝트에 큰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련과 공동으로 테스트하거나 전략적 무기를 개발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정부 정책에 반한다는 이유로 재판받고 보안 등급을 박탈당한다. 애국심과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르고 비밀스러운 사생활까지 파헤쳐져 고통과 절망 속에 남은 세월을 보낸다.
놀런 감독은 흥미롭게도 억압의 배경을 또 다른 플롯으로 펼쳤다. 5년 뒤 열린 루이스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상무부 장관 인사청문회다. 검증 과정에선 오펜하이머의 변호를 방해하려고 FBI 도청 등 헌법 위배를 불사한 행동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종교 재판처럼 진행된 실체 앞에서 스트라우스는 낙마하고 좌절한다. 놀런 감독은 이 대목을 흑백으로 처리했다. 이념에 함몰된 정치의 흑백논리를 지적하려는 의도적 설정이다. 관객에게 객관적 실재가 지배당하는 순간을 목도하게 한다.
놀런 감독은 오래전부터 '버림받음'이라는 감정에 주목했다. 대표작 '인터스텔라(2014)', '메멘토(2001)', '인셉션(2010)' 등에선 꺼져가는 빛에 분노했다. 시간으로 대변돼온 적은 '오펜하이머'에서 사상과 이념으로 옮겨간다. 명성에 걸맞은 용기 있는 양심은 물론 자부, 긍지, 심지어 사회 정의까지 꺾어버린다. 과학을 외부 세력을 견제하거나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핵무기 못잖은 부작용을 야기한다.
어쩌면 필연적 비극이다. 지식은 맹렬히 성장하고, 매스 미디어의 영향은 계속 커진다. 공동체는 자기 보호를 위해 폐쇄적으로 변한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핵무기를 관장할 때부터 지나친 전문화와 분절화를 경계했다. 그에게 공동체는 요새이면서 소속과 상호 의존을 가능하게 하는 성역이었다. 그러나 공공의 지성은 자신은 물론 인류 전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성취였다. 그는 핵무기가 사용된 순간 여실히 깨달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냈고, 인류 재앙을 막으려고 맡은 모든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세상은 오펜하이머가 슈퍼맨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파우스트를 닮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질 향상에도 본성적 욕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놀런 감독은 묻는다.
"우리는 궁극적인 파괴적 기술의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그 기술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걸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 '엔젤 하트(1987)'에서 인용한 소포클레스의 문장과 비슷합니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문장이죠. '지혜가 현명한 사람에게 아무런 이득도 안겨주지 못한다면 그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되는 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무언가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권력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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