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자들 모르고 순진하기만 했던 조선인들

오문수 2023. 8. 2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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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다도해 탐방... 거문도에서 역사를 되새기다

[오문수 기자]

 
 코리아나호에서 참석자들에게 '18~19세기 영국 해군의 조선 남서해안 탐사 재조명' 강의를 하고 있는 한국해양대학교 김낙현 교수 모습
ⓒ 오문수
 

지난 18일(금) 코리아나호를 타고 남해안 명품섬과 다도해 탐방에 나선 일행의 첫날 일정 중 하나는 한국해양대학교 김낙현 교수가 진행하는 '18~19세기 영국 해군의 조선 남서해안 탐사 재조명' 강의를 듣는 것이다.

김낙현 교수의 강의가 의미 있는 이유는 코리아나호에 탑승한 탐방객들의 일정에 거문도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 배웠던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은 1885년에 이뤄졌다. 하지만 영국은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조선의 남서해안을 탐사해왔다.
  
 지난 18일 남해안 명품섬 관광에 나선 일행이 코리아나호 선상에서 한국해양대학교 김낙현 교수가 발표한 '18~19세기 영국 해군의 조선 남서해안 탐사 재조명' 강의를 듣는 모습
ⓒ 오문수
 
코리아나호 선상 강의에 나선 김 교수는 1876년경 조선의 남서해안을 탐사해 자료를 남긴 영국 해군 '실비아호' 선장 '세인트존'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 남서해안의 상황을 집중 조명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외국선박의 조선 접근 방식 달라져

19세기 초까지 조선 바다를 방문한 외국 배들은 주로 표류선이거나 해도나 지도 제작을 목적으로 한 탐사선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이양선의 항해 양상이 달라졌다. 이양선들은 국가 차원에서 군사적 목적, 공식적 통상을 요구하거나 선교 목적으로 왔다. 조선과 영국의 접촉은 구체적이면서 심층적인 만남의 단계로 이행됐다.

1876년부터 여러 차례 조선의 남서해안을 탐사한 실비아호 선장 세인트존이 남긴 자료와 기록은 영국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이 조선을 방문하는 데 좋은 지침서 역할을 했다. 세인트존 선장의 항해기는 개방되지 않았던 미지의 나라 조선과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서구에 소개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세인트존은 영국 해군기지가 있던 홍콩과 러시아 연해주를 연결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조선의 남서해안을 측량했고 해군 함정이 이용할 수 있는 항구와 정박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해 해군성에 보고했다.
    
 19세기 영국해군이 그린 조선지도로 그림 속 1번은 세인트존항(흑산항), 2번은 마코섬(흑산도), 3번은 크라이튼항(소안항), 4번은 포트 해밀턴항(거문항), 5번은 실비아만(진해만), 6번은 초산항(부산항)이다.
ⓒ 김낙현
     
 세인트존이 그린 흑산도의 가옥 모습으로 세인트존이 쓴 <일본 해안의 기록과 스케치>에서 발췌한 그림이다
ⓒ 김낙현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던 이전의 영국 배들과 달리 실비아호의 측량 결과는 당시 영국의 대러시아 정책과 맞물려 주요한 정책 자료로 활용되었다.
세인트존은 흑산군도와 완도, '에드워드 벨처' 함장이 해밀턴항으로 명명한 거문도 일대를 탐사했으며 흑산군도 부근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렀다. 세인트존은 부하들이 육지에 상륙하여 측량할 당시 보았던 조선인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헐렁하고 더럽고 흰색 옷을 입은 무리가 항상 일행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올라왔고, 가는 곳마다 소리를 지르고 몸짓을 하고 때로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흑산도에 나타난 영국 배에 대한 고종실록의 기록
낯선 항해자나 이방인과 갑자기 맞닥뜨린 원주민들은 이들에게 소극적인 행동을 보일 경우가 많다. 신뢰나 우호적인 관계를 쌓기보다는 공포나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종실록 14권>, 고종 14년 6월 11일, 흑산도에 나타난 영국 배에 대한 보고로 양력으로는 1877년 7월 21일에 해당한다.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기혁이, '흑산 별장 김상룡의 치보에 이르기를, 「이달 9일 유시 쯤에 세 개의 돛을 단 배 한 척이 남해로부터 올라와 흑산도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장이 황급히 가보았더니 선체의 윗부분은 검고 아랫부분은 누런색이었으며 깃발은 흰 바탕에 가운데가 붉은 것이거나 검은 바탕에 가운데가 흰 것들이었습니다.
 
글을 써서 물었더니 그자들도 글을 써서 보여준 내용에, 작년 7월 중 이곳에 와서 정박한 영국 배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김새는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이었으며 의복은 흰색이거나 검은색이었습니다. 잡인들의 접촉을 금지시키는 일을 명심하고 거행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인트존은 전라도와 제주도 사이의 해역과 섬을 탐사 측량했다. 그는 마코섬(흑산도)을 비롯한 실비아만(진해만), 크라이튼섬(소안도), 해밀턴항(거문도) 등 자신이 생각한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의견을 <일본 해안의 기록과 스케치>에서 개진했고 이는 1885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사건으로 구체화되었다. 
 
 거문도 관광지도 모습. 거문도는 19세기 영국 해군 실비아호 선장 세인트존이 보았던 당시의 "불모의 섬, 진흙투성의 섬, 비바람을 피할 데 없는 볼품없는 섬"이 아니라 역사와 관광, 힐링까지할 수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 오문수
 
  
 거문도에 있는 영국군묘지로 영국군은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 2년 동안 거문도를 불법 점거했다. 무덤은 영국군이 주둔할 당시 물에 빠지거나 병, 총기 사고 등으로 죽은 9명의 수병 무덤이다
ⓒ 오문수
 
흑산도에서 오래 머물렀던 세인트존은 흑산도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조류의 중간 기착지인 점을 알고 있었다. 그의 항해기에 나오는 흑산도 주민에 대한 기록이다.
 
흑산도 주민의 소는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 나라의 작은 말은 별로 볼 것이 없지만 꼬리는 항상 길게 유지되며 털은 조선인 특유의 모자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조선이 현재와 같은 미지의 나라로 계속해서 더 이상 오래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나는 조선이 더 이상 온전하게 남아있을 것 같지 않다"고 확신한 세인트존은 "소안도를 러시아에 앞서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거문도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했지만 영국 해군성에서는 거문도 점령을 명령했다.
세인트존이 본 포트 해밀턴(거문항)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은 영국인들이 거문도를 방문한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포트 해밀턴에는 오래되고 황폐한 모습을 한 작은 절 하나가 마을 바로 밖에 세워져 있었으며 가끔씩 본토에서 건너온 성직자가 이곳을 찾았다. 어느 마을의 지도자는 그들이 사는 불모의 섬, 진흙투성이의 물, 비바람을 피할 데 없는 해안과 그 주변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의 목적은 단순하고도 유일하게 여자를 붙잡아 데려가는 것, 그리고 대개는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알려주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해군 모습. 영국군 묘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영국해군이 1885년부터 2년간 거문도를 불법 점령할 당시 거문도 주민과 함께 촬영한 사진으로 당시의 주민 모습이 생생하게 나와있다. 영국군묘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제국주의 모르고 순진하기만 했던 조선인들

그는 거문항을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는다면 영국이 마땅히 차지해야 하는 곳으로 평가하였다. 거문도 사건에 대해 논문을 쓴 진상필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영-러 그레이트 게임의 새로운 계략'이었다고 기술했다.

19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인도를 공격할 것을 우려한 영국은 러시아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점령했다. 부동항을 확보하려던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남하정책을 보류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하해 한반도 해역에서 부동항을 찾고자 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랄 수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다.

당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순진하기만 했던 조선사람들. 한반도는 4강의 지정학적 중심에 있다. 우리는 15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거문도 사건이 주는 역사적 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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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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