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남편의 몽유병, 임신한 아내는 두려워졌다
[안치용 기자]
▲ 영화 잠 ⓒ 안치용 |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잠>은 몽유병을 소재로 한 영화다.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에게 느닷없이 시작된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과 그에 따르는 공포, 그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렸다. 맞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뭔가 내용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잠>에서 연출과 각본을 맡은 유재선 감독이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영화적 줄타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경계에서, 혹은 줄타기
영문학의 걸출한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년)는 대표작 <롤리타>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겼다.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나는 바로 그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왜 그럴까?" 나는 이 문장이 나보코프의 문학관을 압축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 잠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모두 3장으로 구성됐고 상영시간이 94분으로 요즘 영화치곤 짧은 편이다. 다양한 이항대립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체계화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대립구도는 '잠들기 두려운 자'인 남편 대 '잠들지 못한 자' 아내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몽유병에 걸린 남편과 그런 남편을 애정으로 감싸며 치료하려는 아내. 남편 또한 몽유병을 고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치료에 있어서 주도권이 아내에게 있다. 극의 흐름상 아내에게 주도권을 주는 게 불가피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유 감독은 "영화의 전반부가 수진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현수의 공포"라며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서서히 변하는 공포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몽유병, 그것도 심각한 수준으로 발병한 몽유병에서 공포가 촉발하고, 이 공포가 두 사람을 동시에 지배하지만 크게 보아 공포의 방향이 '남편→아내'에서 '아내→남편'으로 바뀐다는 얘기다.
여기서 '공포'를 정의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영화가 우리말로 공포를 공들여 또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는 평가가 가능해 보이는데, 만일 공포를 영어 '호러'로 바꿔 쓰면 약간 갸우뚱할 수 있다. 즉 이 영화가 호러무비인가라고 물으면 그렇다는 대답과 아니라는 대답이 모두 나올 것이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전형적인 호러무비는 아니다. 그렇다고 소위 전형적인 호러무비의 요소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외형상 스릴러 요소가 강해 보이지만, 저변엔 호러무비의 문법이 깔려 있다.
▲ 잠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누가 들어왔어"
영화 초반에 현수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즉 몽유병에 걸리면서 내뱉은 대사가 "누가 들어왔어"이다. 접신을 상징하는 대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면, 극중 직업이 배우인 현수의 극 안의 대본상 대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문장이 양가적으로 활용된다. "누가 들어왔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주인공 두 사람이 대립한다. 이 문장이 영화에서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한다. 들어온 것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두고 내내 갈등이 지속된다.
부부에게는, 동시에 관객에게 병에 걸린 것과 귀신 들린 것이 다르다는 인식이 있다.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이 구분법에서 아내는 후자에 더 확신을 두게 된다. 남편 또한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명료하지는 않다. 의사와 무당이 동시에 나오고 치료와 주술이 병행하는 게 이러한 이항대립의 결과물이다. 참고로 근대 이전에는 병에 걸린 것과 귀신 들린 것 사이에 크게 차이를 두지 않았다.
▲ 잠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롤리타>의 인용문처럼 경계선의 확인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을 실패라고 할 수는 없다. <잠>의 연출은 경계선의 확인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확인이 계속해서 지연되어 관객이 극장 문을 나갈 때까지 이어진다.
▲ 잠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성공적인 데뷔
<잠>은 2023년 5월 21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처음으로 공개됐다. 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 에이바 카헨은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 <잠>은 졸릴 새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감독은 고군분투하는 젊은 커플이 아이를 낳기 전과 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영화를 만들어냈다"라고 <잠>을 초청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그밖에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여러 유수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유 감독은 입봉작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수천억 '먹튀' 의혹, 불꺼진 사무실..."여기저기서 피해자 찾아온다"
- 돌고래 몸에서 나온 독성물질... 일본 오염수가 가져올 끔찍한 미래
- 일본 오염수 방류 시작됐는데 윤 대통령이 안 보인다
- 북한 사람들의 "남조선 아이들" 표현... 사실은 이렇다
- [단독] '서이초 교사 49재 재량휴업일 지정'에 벌써 268개교 동참
- 윤미향 최후진술에 눈물바다 된 법정 "국회의원 된 대가 너무 컸다"
- [10분 뉴스정복] 판사 출신 KBS 이사장의 수상쩍은 과거
- 이재명 맹비난한 국힘 "입은 반일 선동, 머리카락은 친일인가"
- 민주당 "방류 못 막은 대통령, 피해보상이라도 받아내야"
- 거센 빗속 경찰 해산 종용에도 "일본은 학살 인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