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통과한 자매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문종필 2023. 8. 24. 08: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뷰] 만화가 류승희 지음 <자매의 책장>

[문종필 기자]

"여전히 나는 그 시절을 살고 있다."

만화가 류승희의 신작 <자매의 책장>(2023)이 지난달 출간되었다. 3년 전에 출간된 <그녀들의 방>(2019)과 긴밀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어,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탐닉했던 독자라면 이번 신작을 보다 심도 있게 느낄 수 있다.

이런 독서행위를 통해 만화가 류승희의 작품을 더 가깝게 만지게 된다. 그러니 새로운 독자들의 경우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그녀들의 방>을 먼저 꼭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녀들의 방』(2019)과 『자매의 책장』(2023) 표지
ⓒ 보리
 
전작이 아버지 없이 엄마와 세 자매가 단칸방 반지하 다세대주택에서 당차게 힘든 시기를 통과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번 신작은 이런 시기를 건강하게 통과한 어른이 된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흔들렸던 유년의 시간을 통과한 어른이라고 해서 이들의 지금 상황이 마냥 평탄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방식이든지 삶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그렇다.

즉, 이번 신작은 지독한 유년의 영향권 안에 놓인 돈독한 자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서두에서 <그녀들의 방>을 먼저 읽기를 권한 것이다. 전작과 같이 읽으면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어 전혀 다른 작품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만화가는 <자매의 책장>을 계절에 따라 색으로 변화를 주었다. 봄에는 노란색 계열로, 여름은 연두색 계열, 가을은 붉은색 계열, 겨울은 하늘색 계열로 연출을 시도했다. 독자들은 읽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계절의 변화는 만화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매의 성장 서사와 함께 적절히 어울려 표현된다. 엄마와 함께 사는 언니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동생의 심리를 따라가는 가는 과정이 <자매의 책장>을 깊이 읽는 하나의 키워드이다.

힘겹던 시기를 겪은 소녀들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도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씁쓸함과 후회가 남는다. 이러한 모습은 칸과 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자매의 고백체로 채워진다. 특히 가정을 꾸린 동생의 입장에서 두드러져 표현된다. 엄마 품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남편과 아이와 시댁 식구들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유년 시절 자신의 가족을 셈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매의 책장』 110쪽.
ⓒ 보리
 
가령, 동생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난 뒤, "남편과 싸울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174)게 된다고 말한다. 시댁에 방문해서는 비교적 부유하게 잘 살았던 남편의 부모님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숟가락 한 번 가져 본 적 없는 친엄마를 떠올리며 죄스러워한다. 시댁 부모님들의 "금빛 수저를 볼 때마다 엄마 얼굴이"(110)이 아른거린다. 자신을 지워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엄마가 오버랩 된 것이다.

짠한 것은 자신의 아이만큼은 '엄마'가 더 이상 슬픔이나 아픔과 같은 단어와 연관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한다. 엄마에 대한 부정이기보다는 엄마를 더욱더 가슴에 품는 애절한 장면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어른이 된 자매의 성장통을 담은 이 작품은 이런 눈물로 공감을 자아낸다.

이 텍스트에서 "책상은 나와 동생에게 유일한 자기만의 공간"(188)이었다는 말은 꽤 치명적이다. 유년 시절 자매에게 유일한 공간이 책상이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책상에서 할 수 있는 독서행위 이외에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할 때 마을 주변을 돌아다녀야 했고, 마을을 돌며 '우리집 찾기' 놀이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갈망했다. 이런 경험을 한 번 정도 해보지 않았는가. 길을 걷다가 예쁜 집을 만나게 될 때, 나의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내비친적 말이다. 자매에게 공간은 이처럼 채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내포한다. 그래서 언니는 "좋은 집만 있으면 식구들이 행복할 줄 알았다"(84)라고 고백했는지 모른다.
 
 『자매의 책장』 258-259쪽.
ⓒ 보리
 
자매에게 공간은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다.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읽었던 것도 이런 짠한 감정과 교차한다. 따라서 <자매의 책장>에서 동생이 새로운 공간을 찾아 '이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동생의 이사는 자신만의 공간을 품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니 그렇다. 나아가 자매의 책장 속 책들 또한 자연스럽게 옮겨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장면은 자매가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확장해 나만의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만화가 류승희가 실제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텍스트에 적힌 묵직한 고백의 언어들은 담담하지만 탄탄하다. 아버지의 부재를 감당하는 자매의 이야기와 항상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 아프고 짠한 엄마의 이야기, 이제 더이상 소녀가 아님에도 카톡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쌓는 자매의 사연은 그래서 우리를 다독여 주는 것 같다.
 
지난해 봄, 고양시에서 강원도로 이사를 했다. 몇몇의 우연과 나의 의지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도시로 오게 되었다. 거실 한구석 창문 옆에 내 책상을 놓았다. 의자에 앉으면 창밖으로 화단에 심어진 나무 몇 그루와 그 뒤로 옆 단지 아파트의 외벽이 보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 틈으로 작은 하늘도 보였다. 그 책상에 앉아 날마다 <자매의 책상>을 그렸다.

'작가의 말' 일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행히 류승희는 현재 온전한 책상을 얻을 듯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나무와 꽃을 벗 삼아 만화 작업을 쉬지 않고 진행하는 듯도하다. 그녀는 칸과 홈과 색으로 자신 안에 있는 유년의 상처와 후회와 아쉬움을 <그녀들의 방>과 <자매의 책장>에서 재현한다. 이 과정에서 또 그렇게 작가와 인물은 성장하고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우리는 이 과정을 또다시 손꼽아 기다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 블로그에 수록될 수도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