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의 Epi-Life] 노비, 양반, 시민

서지영 2023. 8. 2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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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노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친인척이 모여 사는 마을에 잔치가 있었는데, 어른들 따라 그 동네에 가서 잔칫집에서 하룻밤인지 이틀밤인지 묵었습니다. 그 마을에 재실이 있었고, 재실 앞에서 저는 노비를 보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가기 전의 일이니까 1967년이나 1968년의 일입니다. 그때의 일을 어찌 잘 기억하냐면, 노비를 보았던 그날의 일을 제가 청소년이었을 때에 어른들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확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동네 잔치 갔을 때에 재실을 지킨다는 아저씨가 있었잖아. 머리 기르고 거지처럼 옷을 입고. 고개 푹 숙이고 네네 하면서. 동네 아이들한테 존댓말을 하던. 아이들은 반말 하고. 그 아저씨 있잖아.” “응응. 노비.” “노비 맞아?” “재실 노비 맞아.”

제가 그때 그 일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아이들의 반말 때문입니다. 제 눈에는 분명히 어른인데 동네 아이들이 그에게 반말을 했습니다. 어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교육을 심하게 받던 때인지라 어른에게 반말하는 아이들이 정말 이상해 보였습니다. 반말을 하는 아이들에게 그는 존댓말을 했습니다. 말을 나누는 중에는 그는 고개를 들지도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노비란 ‘굴욕을 감수하는 사람’으로 제 머리에 각인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고 노비는 최하층 신분이었습니다. 흔히 “종”이라 불렀습니다. 어버이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로 살아야 했습니다. 노비는 가축처럼 사고팔고 하였습니다. 노비제도가 폐지된 것이 1894년입니다. 1960년대에 노비가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제 어버이 세대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노비는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든 이들이 스스로 노비의 삶을 유지했던 것이 아니었나 추측을 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 본 재실 노비는 한반도의 마지막 노비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저는 노비는 고사하고 스스로 노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양반 아닌 사람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노비의 자식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있다고요? 미당 서정주 시인이 그랬다고요?

“애비는 종이었다.”

‘자화상’이란 시가 이렇게 시작되지요. 명치 아래를 퍽! 하고 때리는 문장입니다. 서정주는 이 문장 하나로 당시에 가장 핫한 시인으로 등극을 합니다. 노비의 아들임을 스스로 드러내다니.

서정주의 고향은 전북 고창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습니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농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마름은 지주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지 노비는 아닙니다. 서정주의 고향 마을인 질마재에서 서정주 집안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한 적이 있는데, 노비 집안은 아닙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시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말이 샜습니다. 노비와 노비의 자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조상이 노비였다는 것만으로 굴욕적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데 누가 노비 집안 출신임을 공개하겠는지요.

노비 신분은 사라졌어도 노비적 상황은 수시로 우리 앞에 전개됩니다. “위에서 알아서 할테니까 넌 조용히 있어.” “왜 말을 안 들어. 쫓겨나고 싶어?” 각자 맡은 일을 하면 될 것인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논리로 위에서 누릅니다. 합리적 이유와 근거 없이 담당자에게 “넌 빠져”라고 말하는 것은 “넌 노비야” 하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노비 제도는 없어졌지만 노비로 살라 하는 사회적 강제력은 여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럽은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다들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되었는데 한반도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다들 지배계급인 양반이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양반이니까 타인을 노비로 삼으려는 심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공화정의 시민으로 사는 일에 이제 적응을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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