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젠더·정치 좌편향 판결 논란 컸다…이균용 대법서 뒤집히나

문현경, 김정연, 윤지원, 이병준, 김정민 2023. 8.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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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은 법조계 안팎에서 사법권력 교체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의 진보 과반 구도는 지난달 이미 깨졌다. 여기에 다음 달 대법원장이 바뀌면 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추는 보수로 기울게 된다.

지난 1년 간 중도보수 성향의 세 대법관(오석준·서경환·권영준)이 임명된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불편한 동거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지난달 대법관 임명 과정에선 양쪽이 원하는 후보가 다른 가운데 대통령실에서 김 대법원장이 특정 후보를 제청할 경우 거부할 것을 미리 검토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파국은 피했다. 이 후보자가 국회의 임명 동의를 받는다면 앞으론 이런 불협화음은 사라지게 된다.

이 후보자는 지명 다음날인 23일 “최근에 무너진 사법 신뢰와 재판의 권위를 회복해 자유와 권리에 봉사하고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바람직한 법원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하겠다”고 첫 공개 발언을 했다.

김영옥 기자


대법원장은 대법관 임명 제청권을 통해 상고심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대법원 판례는 1·2심에서 일종의 지침으로 기능한다. 모든 판사들의 판결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대법원장과 대통령실의 성향 일치도가 높아지면 주요 판결의 흐름이 어느 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지는 구조다. 법관 인사권도 대법원장의 몫이다. 이를 제한하는 여러 제도가 도입됐지만 대법원장의 영향력은 여전히 작지 않다.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출신 한 변호사는 “진보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업 철학이자 문재인 대통령의 통치 철학이었다”고 말했다. 대법관 임명을 제청하는 대법원장과 임명할 대통령의 뜻이 같다면 이를 판결로 실현할 가능성이 높은 인사가 대법관이 된다. 문재인 정부-김명수 대법원에서는 소위 ‘정통 엘리트 법관’ 보다는 정치적 성향,성별,학벌 등 다양성을 상징할 대법관들이 많이 임명됐다. 검사 출신의 한 로스쿨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지만,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대법관들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진보 성향 대법관이 대법원 구성(대법원장 포함 14명)의 과반을 점하게 됐다. 김선수(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정희·이흥구(우리법연구회), 김상환(국제인권법연구회), 민유숙(젠더법연구회) 대법관 등이다.

김경진 기자


같은 성향의 대법관들은 의견 일치도가 높고, 이는 대법관 내 주류 세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리걸테크 기업 엘박스에 의뢰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관끼리의 의견 일치·불일치 정도를 추산한 결과, 김상환-노정희 대법관의 의견 일치도는 80% 이상, 김상환-민유숙, 김선수-노정희 대법관의 의견 일치도는 70% 이상이었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동원·안철상 대법관은 이들과 의견이 다를 때가 많았다. 민유숙-안철상 대법관, 김선수-이동원 대법관의 의견 일치도는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이동원 대법관은 가장 많은 반대의견을 내 ‘미스터 소수의견’으로 불린다.

김경진 기자


박경민 기자

진보벨트가 주류를 이룬 김명수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통해 이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기에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한 결과물을 내놨다. 김 대법원장 취임(2017년 9월) 이후, 양 전 대법원장 시절 ‘고의 재판 지연’ 논란이 일었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확정지어 파장을 일으켰고(2018년 10월), 양 전 대법원장 때 부정했던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례변경도 했다(2022년 8월). 전체 변경 건수는 이전 대법원장 시기보다 많지 않았지만, 사회에 후폭풍을 일으키는 판결이 적잖았다.

박경민 기자


대법관들의 이념적 쏠림 현상은 노동·젠더·정치인 관련 판결에서 두드러졌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노동 사건에서 대법관들의 정치성향이 뚜렷하게 갈린다”며 “기업들은 민변 출신이자 노동 전문인 김선수 대법관이 소부 주심을 맡게 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5월 현대차 간부사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근로자 동의 없어도, 사회통념상 합리성 있는 취업규칙 변경은 유효하다”는 기존 판례를 45년 만에 뒤집고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아닌 집단적 동의가 기준이 돼야 한다”며 노동조합 편에 섰다. 이외에도 고용노동부가 전국교직원노조에 법외노조 통보처분을 한 것은 위법하다(2020년 9월)는 판결과 노조원이 산업재해로 사망 시 자녀를 특별채용할 수 있게 한 단체협약은 유효하다(2020년 8월)는 판결이 이어졌다.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으로 법원 내 양성평등을 위한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던 민유숙 대법관은 젠더 관련 판결에서 눈길을 끄는 역할을 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4월 “사적 공간에서 남성 군인 간 성관계는 죄가 아니다”며 10년 전 대법관들이 “합의 여부를 떠나 군형법상 추행”이라 본 판결을 뒤집었다. 민 대법관을 포함 다수의견은 “동성 간 성행위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한다는 평가는 이 시대 보편타당한 규범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11월엔 판례를 변경해 미성년 자녀를 둔 트렌스젠더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며 “자녀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부조리 상태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존중 및 차별받지 않을 권리의 보장이라는 헌법적 요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다”고 했다.

정치인 관련 판결은 매번 편향 시비가 있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뤘다고 방송통신위원회가 제재한 것은 부당하다는 다수의견(2019년 11월)에 섰던 민유숙·김선수·노정희 대법관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를 종북이라고 비난한 변희재씨에 대해선 명예훼손을 인정해야 한다는 반대의견(2018년 10월)을 낸 바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을 삼가고 성숙한 토론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민·노 대법관은 친형을 강제 입원시킨 적이 없다는 지선 토론회 발언으로 기소됐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건에선 “공적·정치적 관심사에 대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2020년 7월)고 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 한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 인정 범위의 문제라기보다, 문제가 된 표현의 내용이 대법관의 생각이나 성향과 일치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수 대법원은 한쪽에선 약자·소수자 편에서 진보적 변화를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이념 편향으로 사법 불신을 심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실제로 김 대법원장 체제에선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할 우려가 있다며 담당 재판관을 바꿔 달라는 요청이 크게 늘었다.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이 대법원 법원행정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법관 제척·기피·회피 건수는 2017년 879건에서 2022년 1207건으로 약 30% 늘었다. 이 중 대법원 사건에서의 요청은 116건(2017년)에서 193건(2022년)으로 1.6배가 됐다.

박경민 기자


새 대법원장은 앞으로 3년 9개월 남은 윤 대통령 임기(2027년 5월까지) 동안 9명의 대법관의 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하게 된다. 내년에만 6명이 바뀐다. 이균용 후보자에 대해선 “법리에 충실하단 점에서 정통 법관이나, 진보·노조 쪽에서 보면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는 건 틀림없다(고법부장 출신 변호사)” “윤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지명한 건 오른쪽으로 균형을 맞춰보라는 의도일 것(판사 출신 변호사)” 등의 평이 나온다.

일각에선 대법원 이념적 정체성이 좌회전·우회전이 갈지자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서울의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김명수 대법원이 비판받는 이유가 지나친 정치적 편향 때문인데 새 대법원장이 나서 반대편으로 급회전한다면 법원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이 불과 몇 년 만에 방향을 확 바꾸려 하기보다는 사회 여론이나 하급심의 기류 변화와 맞물려 가며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대통령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면 대법원·헌법재판관 구성이 전부 바뀌게 되는데 대법원장 교체는 그 도미노의 출발점”이라며 “우리 사법부의 구조가 정치적 흐름에 취약한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말했다.

문현경·김정연·윤지원·이병준·김정민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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