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의 복음과 삶] 소통인가 감시인가

2023. 8. 2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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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지구촌을 초연결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소셜네트워크는 계속 진화 중이다. 휴대전화는 소통 방식에 혁명을 가져왔다. 지식과 정보의 공유가 넓어졌다. SNS의 기능들로 인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면에는 부작용도 있다. 때로는 소통보다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족관계에서도 잠시라도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직장 내에서 서로의 동선을 파악하고 때로는 통제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개방된 사회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도 불쑥 밀고 들어오는 문자들, 보고 싶지 않아도 밀려오는 정보의 바다에 익사할 지경이다. 찰스 아서는 그의 책 ‘소셜 온난화’에서 소셜네트워크가 활발해진 세상이 오히려 소통의 부재를 가져오고, 이전보다 더 갈등을 부채질하는 세상이 됐다고 지적한다.

연결하는 매체들은 연결만 시킬 뿐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의 이론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실제로 SNS의 과도한 열기는 더 많은 관계의 벽을 만들고 있다. 저자는 기후 온난화가 위기를 몰고 오듯, 소셜 온난화는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올지 모른다고 전망한다. 알고리즘은 단순한 정보 제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양극화하고 있다.

24시간 연결할 수 있는 휴대전화 때문에 외로움은 더 깊어졌다. 살가운 만남은 희소해지고 문자로 대체된 인간관계는 외로움을 부추긴다.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모두와 단절돼 가는 현대인은 점점 더 높은 성벽을 쌓고 있다.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열린 사회에서 도리어 외부와 단절한 외톨이들이 양산되고 있다.

문명이 만들어 내는 첨단 신기술은 바벨탑처럼 언어의 장애를 일으키고 인간관계를 더 혼잡하게 만들어 간다. 지나치게 열린 소통 사회로 이전보다 자유롭게 숨 쉴 공간이 적어졌다. 인간은 자유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사생활을 갖고 싶어 한다. 개인적 자유를 누릴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금실이 좋은 부부라도 24시간 같은 공간에 있으면 힘들어진다.

개인적 자유의 확보는 더 풍성한 관계를 위한 일시적 숨 고르기다. 홀로 있는 시간이 보장돼야 한다.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에너지를 비축하게 된다. 집을 떠나 있을 때 가족은 더 그리워지고 새로운 친밀함으로 만나게 된다. 공간 여유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움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고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폭력이다. 사랑과 집착은 다르고 팬과 스토커는 다르다. 사랑한다면 숨 쉴 공간을 주어야 한다.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 가족이라도 약간의 비밀은 모른 척하고 허용해 주어야 진실하게 만든다. 나만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면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너무 깊이 모든 것을 알려고 하면 불신이 일어나고 신뢰에 금이 간다. 사랑할수록 꽉 붙들려 하기보다 느슨하게 붙들어 상대에게 적당한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사랑은 상대를 구속하기보다 자유를 제공한다. SNS의 소통 기능은 발달했지만 삶의 노출이 심해졌다. 피로감을 호소하고 불안증세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다.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따뜻한 만남은 점점 사라지고 도리어 상대를 확인하고 닦달하는 수단으로 오용되고 있다. 요즘은 음성보다 문자로 대화를 많이 한다. 문자마저 이모티콘으로 대체할 때가 많다. 편리한 소통 수단 때문에 따사로운 교감을 주고받는 일은 사라져간다. 소통의 수단이 소통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예수님은 커뮤니케이션 대가였다. 군중 속에서 당신의 옷 가를 살짝 만져도 반응하고 공감하시고 가는 길을 멈추셨다. 처음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도 금방 대화 물꼬를 여신 주님은 소통의 방식을 잘 알고 계셨다. 문명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것을 무작정 향유하기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다.

이규현 수영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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