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카르텔 척결’에 R&D 예산 13.9% 깎여…경쟁력도 깎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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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R&D예산 3.4조 삭감…8년 만에 축소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과학기술계 혼란
내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축소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22일 밝힌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에 따르면, 주요 R&D 예산이 올해보다 13.9%(3조4000억원) 감소한 21조5000억원으로 책정됐다. 국회 의결 전 정부 예산안이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2016년 R&D 예산안 심의 이후 8년 만이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예산을 늘리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길이고, 늘어나는 예산 속에서 안일함과 기득권이 자랐다”며 “이번 예산 조정은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R&D 투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1위, 절대액 기준으로도 세계 5위에 달하는 ‘과학입국’의 나라를 자랑해 오던 그간의 입장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일이다.
정부는 애초 6월 말에 내년도 R&D 예산안을 확정해 기획재정부에 넘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과학계의 ‘R&D 카르텔’ 문제를 질타하면서 R&D 예산안은 원점에서 재검토됐다. 당시 윤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R&D 카르텔 타파와 함께 R&D 국제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의 지적에 틀린 건 없다. 비효율을 걷어내고 필요한 곳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코리아 R&D 패러독스’를 치유하는 길이다.
문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과학 현장에 미칠 영향이다. 지금 국내 과학기술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예산이 크게 삭감된 기초연구 부문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쪽은 한숨이 쏟아진다. 특히 출연연은 올해 집행 중인 운영 예산마저 일부 깎이면서 “당장 돈이 없어 국내 출장도 못 다닐 판”이라고 호소한다. 과기계 일부의 부조리를 겨냥한 대통령의 지시가 과기계 전체를 휘두르는 모습이다. 갑자기 예산이 늘어난 해외협력 부문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다. 대통령의 지시에 담당자가 미국·유럽 등 선진국 연구자에게 연락해 “R&D 협력할 것이 없느냐”고 갑작스레 물으니 “내년 협력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무안한 답이 돌아왔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차라리 코로나19 이후로 나라 살림이 어려워졌으니 다같이 고통을 분담하자고 설득했으면 어땠을까.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세수만 해도 44조원 이상 부족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R&D 예산의 대폭 삭감은 안이한 발상이다. 농부가 당장 겨울나기가 힘들다고 이듬해 봄에 뿌릴 씨앗까지 먹어치울 수는 없지 않은가.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에 있는 한국 입장으로서는 R&D 예산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과학기술 현장에서 혁신의 동력이 꺾이지 않도록 섬세한 정책 실행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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