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의 신진서, 14년 만에 응씨배 찾아왔다
신진서(23) 9단이 ‘바둑 올림픽’ 응씨배 제9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신 9단은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대회 결승 3번기 2국에서 중국 셰커 9단에게 백 226수 만에 불계승하고 결승 종합성적 2대 0으로 우승했다.
결승 2국은 차라리 심심한 바둑이었다. 결승 1국에서 무기력하게 물러났던 셰커가 초반부터 실리를 챙기며 맞섰지만, 신진서는 한 번도 우세를 내주지 않았다. 두텁게 판을 짠 뒤 상대가 무리하면 적절히 응징해 국면을 유리하게 이끄는 모습이 전성기의 이창호 9단을 보는 것 같았다.
우상 흑 대마를 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신진서는 굳이 탐하지 않았다. 공격하다가 물러났고, 급소를 찔렀다가 바로 큰 곳을 차지했다. 아주 크게 앞선 것도 아니었다. 적게는 한두 집, 많게는 일고여덟 집만 앞섰다. 불리해진 형세를 느낀 셰커가 막판에 총공세에 나섰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돌아보면, 신진서는 후퇴만 거듭한 것 같았다. 셰커는 대마를 다 살렸고, 네 귀를 다 차지했다. 그런데도 힘 한 번 못 쓰고 무너졌다. 이런 희한한 바둑이, 아니 일방적인 결승전이 또 있었을까. 바둑TV에서 해설한 박정상 9단은 “실력 차가 드러나는 결승전이었다”며 “결승 2국은 신진서의 완승이었다”고 말했다.
우승 직후 신진서는 “응씨배를 위해 특별한 준비를 많이 했는데 우승하게 돼 기쁘다”며 “이전 세계 대회에서 많이 패하기도 해 이번 우승이 특히 값지다”고 말했다. 최근 신진서는 국제 대회에서 부진했다. 지난 6월 란커배 결승에서 구쯔하오 9단에게 역전패했고, 7월 국수산맥 결승과 몽백합배 16강전에서도 잇달아 졌다. 신진서는 “긴장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부담을 느껴서였는지 대국 전 잠을 잘 못 잤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드러냈다.
응씨배 우승으로 신진서는 명실상부 2020년대 세계 바둑 최강자로 등극했다. 신진서는 응씨배 등 8개 국제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그중 메이저 대회가 5개(응씨배, 삼성화재배, 춘란배, LG배 2회)다. 세계 대회에서 10차례 우승(메이저 8회)한 커제 9단은 2020년 이후 우승이 없다. 반면에 신진서의 메이저 우승은 모두 2020년 이후다.
응씨배는 대만 재벌 잉창치(1914~97) 선생이 1988년 창설한 대회다. 유일하게 4년마다 열려 ‘바둑 올림픽’으로 불린다. 우승 상금 40만 달러(약 5억4000만원)도 단일 대회 중 최고 액수다. 이번 응씨배는 코로나19로 파행을 거듭했다. 원래는 2020년 4월 개막할 예정이었으나, 5개월 뒤 온라인 대국으로 본선 1회전을 치렀고, 4강전은 2021년 1월에 마쳤다. 주최 측이 결승전만큼은 대면 대국을 고집해 2년7개월 만에 열렸다.
응씨배는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다. ‘한국 바둑 사천왕’이라 불렸던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1~4회 대회를 차례로 우승했다. 신진서의 우승으로 한국은 2009년 최철한 9단 이후 14년 만에 우승컵을 탈환했다.
신진서는 또 다른 대기록 달성도 눈앞에 뒀다. 이번 대회 직전까지 확보한 올해 상금 7억2614만5514원에 응씨배 우승 상금을 더하면서 연간 상금 12억원을 넘어선다. 오는 11월 삼성화재배(우승 상금 3억원)마저 차지한다면 연간 상금 총액 15억원을 넘긴 첫 한국 기사가 된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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