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플러스] 반대에 막힌 ‘횡성 호국원’… 유치 8개월째 설명회도 못열어
덕촌리에 봉안시설 2만기 규모
1000억원 이상 경제효과 기대
주민들 1인시위하며 강력 반발
23일 중앙고속도로 횡성IC를 빠져 나와 5분여를 달리자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덕촌리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바탕의 현수막 10여개가 걸려있었다. 현수막에는 ‘군민을 속이는 횡성군은 호국원 유치를 철회하라’ ‘덕촌리는 꿈도 행복도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덕촌리 주민 정청룡(74)씨는 “현수막은 마을에 국립묘지가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걸어놓은 것”이라며 “남들은 호국원이 혐오시설이 아니라고 하는데 누가 집 앞에 공동묘지가 들어서는 걸 반가워하겠나. 호국원 터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도 아니고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정씨 부인 박호근(72)씨는 “덕촌리가 호국원 부지로 선정됐다는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 마을이 후보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이 없었다”며 “호국원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주민들과 순번을 정해 매일 1시간씩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횡성군이 국립호국원을 유치했지만 사업 확정 8개월이 넘도록 주민설명회조차 열지 못하는 등 답보상태에 빠졌다. 횡성군이 주민들에 대한 설명 또는 의견 수렴 없이 호국원을 유치한 탓이다. 덕촌리 주민들은 “호국원 부지 선정과정에서 주민 의견을 듣지 않았다”며 사업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강원도는 2020년부터 호국원 유치를 추진해 왔다. 제주도를 비롯해 수도권과 충청권, 경기권 등 모든 권역에 12개의 국립묘지가 들어섰지만 강원도에는 유일하게 국립묘지가 없다. 도내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들은 충북 괴산이나 경북 영천 등 다른 지역의 국립묘지나 개인묘지에 안장됐다. 6·25전쟁, 월남 참전용사 등 도내에 거주하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는 1만8000여명에 이른다.
도는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정부에 호국원 설치를 건의했고, 지난해 1월 호국원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해 강원도로부터 호국원 유치 희망지를 제안받았다. 유치 희망지는 양구와 영월 각각 1곳, 횡성 5곳 등 모두 7곳이었다. 국가보훈부는 입지타당성 등 연구용역을 마친 후 지난해 12월 1일 덕촌리 일원 40만㎡를 호국원 부지로 선정 발표했다. 국립호국원은 총사업비 433억원이 투입된다. 봉안시설은 2만기 규모다. 2026년 6월 착공, 2028년 11월 개원이 목표다.
하지만 사업은 부지 선정 발표 직후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국가보훈부와 강원도, 횡성군은 부지 확정 발표 8개월만인 지난달 21일 공근면행정복지센터에서 첫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려고 했지만 주민 반발로 무산됐다. 공근면 주민들을 대상으로 국립호국원 사업 규모와 향후 일정, 세부 계획 등을 설명할 예정이었다.
설명회는 덕촌리 주민으로 구성된 횡성호국원 유치반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공근면행정복지센터를 점거하고 유치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열리지 못했다. 덕촌리는 현재 36가구 6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지난해 12월 언론을 통해 최종 부지가 결정될 때까지 덕촌리가 후보지로 포함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책임을 뒤늦게 모면하려고 이제 와 여는 주민설명회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비대위는 부지 선정과정을 들여다보려고 지난 3월 국가보훈처와 강원도, 횡성군에 유치 사업 선정과 관련한 자료를 요구했지만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 비대위는 “정보공개청구 관련 법령에 따른 정당한 요구마저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고광수 비대위원장은 “주민 의견수렴 없이 시작돼 논란을 빚고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찬반투표를 진행하는 등 의견을 수렴해 사업을 추진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횡성군은 적법한 행정절차를 거쳐 최종 부지가 결정됐다는 입장이다. 횡성군 관계자는 “공모 신청을 할 때 국가보훈부 행정절차에 유치 희망지의 주민 의견을 반드시 수렴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었다”며 “다만 주민들이 호국원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진 만큼 국가보훈부와 함께 소통에 나서는 등 주민 설득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강원도와 횡성군은 호국원이 조성되면 덕촌리 마을과 지역경제에 큰 파급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는 국립묘지 유치 당시 봉안당 5만기를 기준으로 1000억원 이상의 경제효과와 1400명 이상의 고용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주민들은 이런 기대효과도 장밋빛 청사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규섭(50)씨는 “최근 주민들과 함께 충북 괴산호국원을 둘러봤는데 호국원이 들어선 마을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사실을 확인했다”며 “괴산호국원 주변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명절에는 차가 온종일 막히고, 마을 발전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마을은 보상도, 발전도 필요 없으니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달라”고 말했다. 백오인 횡성군의원은 “국립호국원을 찾는 방문객이 횡성지역 상권에 유입되며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순 있다”며 “다만 지자체가 운영하는 장묘시설과는 달리 호국원이 들어서는 마을에 호국원 식당이나 매점의 운영권을 줄 수도 없고, 인력을 우선 채용할 수도 없어 마을 자체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김명기 횡성군수는 “주민들이 부지와 관련해 찬반투표를 요구하지만 정부의 입지 선정 과정을 거쳐 이미 결정된 사항을 일부 주민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투표를 할 수는 없다”며 “지역에 많은 도움을 줄 호국원 사업이 원만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주민들과 더 소통하고 설득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횡성=서승진 기자 sjse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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