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잘해도 억대 연봉… 기업들 ‘AI 인재 모시기’ 사활
빅테크·유통·엔터기업서도 러브콜
관련 학위 없어도 업계 최고 대우 파격
넷플릭스는 AI 관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머신러닝 개발자도 함께 뽑고 있다. 머신러닝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구축하고 확장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할 ‘선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는 연봉 75만 달러가, 고품질 현지화를 지원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할 ‘머신러닝 개발자’에게는 70만 달러가 제안됐다.
AI 전문가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과 스타트업들은 적게는 10만 달러(약 1억2900만원)에서 많게는 37만5000달러(약 4억8400만원)에 이르는 고액 연봉을 제시하고 있다. 구글이 5000억원을 투자한 미 샌프란시스코의 AI 스타트업 앤트로픽은 올 초 생성형 AI 관련 직종 채용 공고를 올리며 연봉 3억~4억원 수준을 제시했다.
챗GPT로 알려진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MS)도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내놨다. 미국의 보험회사인 ‘가이코(GEICO)’는 자연어 처리가 가능한 데이터 과학자를 채용한다고 공고를 냈다. 연봉은 12만 달러(약 1억6044만원)에서 19만 달러(약 2억5403만원) 사이다. 추가로 보험과 퇴직금 4% 면세, 자가학습 수업료 지원 등의 혜택을 내세웠다.
AI 전문 학위가 없어도 고액 연봉을 제시한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과 스타트업들은 AI 전문 학위가 없어도 AI와 대화만 잘하면 억대 연봉을 주겠다고 나섰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빅테크, 유통, 금융,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이 AI 인재를 모시려고 혈안이 돼 있다.
AI 업계 인재가 귀하다 보니 오히려 AI 엔지니어들이 ICT분야가 아닌 직종에 왜 가야하는지 고용자에게 질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 부동산 업체 JLL은 최근 AI 전문가 채용공고를 올리고 업계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면접에서의 일화를 소개하며 “한 구직자가 ‘내가 AI 엔지니어로서 왜 부동산 분야로 와야 하냐’라고 했다”며 이에 “우리 회사는 수십 년에 걸친 자산 데이터가 있다. 빌딩 관리, 에너지 절감, 매매가 책정 등 AI 모델 훈련에 쓰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입을 모아 AI 실무자보다 중간 관리자급 직무를 맡을 사람은 더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각 분야의 1위를 달리는 기업들도 AI 전문가를 찾기 위해 억대 연봉을 내걸었다. 미 최대 이커머스 기업 아마존은 생성형 AI 수석 관리자 직책을 맡은 이에게 34만3300달러(약 4억5900만원)를 주겠다는 공고를 냈다. 미 대형마트 체인인 월마트는 AI 담당자 연봉에 25만2000달러(약 3억3692만원)를 약속했다. 미 거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생성형 AI 기술자를 찾는다며 상여금을 포함해 40만 달러(약 5억3480만원)를 주겠다고 했다.
AI 관련 학위가 없어도 억대 연봉을 내건 기업들이 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뜨는 직종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prompt engineering)’이 그것이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생성형 AI가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AI에 지시하고 대화하는 기술이다. 생성형 AI는 사용자와의 대화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 대화 기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생성형 이미지를 생성하는 AI에게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꽃밭을 그려줘”와 “화려한 꽃이 가득한 꽃밭을 그려줘”를 지시하면 AI가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대화 기술은 AI의 발전에 중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직종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직종은 특히 ‘대화 기술’에 집중돼 있으므로 관련 학위가 없어도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최근 미국의 광고 문구, 판촉 행사 소개문 등 마케팅 문구를 AI를 통해 제작해주는 ‘카피.에이아이’는 프리랜서 작가이자 역사 연구원을 고용하며 억대 연봉을 제시했다.
안나 버스타인 카피·AI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AI에게 여러 괴상한 지시를 다양한 방법의 대화를 통해 내린다. 문학적 언어와 분석적 언어를 연결하는 교차점은 작가로서 다양한 언어에 접근하는 AI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영국의 대형 로펌인 ‘미시콘 데 레야’도 초거대 언어모델(LLM)과 대화할 수 있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를 공개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스타트업 최초로 생성형 AI 포털을 운영하는 ‘뤼튼(Wrtn)’이 억대 연봉을 내세우며 프롬프트 엔지니어 채용 공고를 냈다. 이세영 뤼튼테크놀로지스 대표는 “미래에는 코딩 지식보다도 창의적인 생각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변화하는 시장에 빠르게 대처해 국내에서는 최초로 ‘AI와 대화하는 엔지니어’를 채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 국내 생성형 AI 스타트업 대표는 “올 상반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투자 혹한기보다 AI 인재를 모시기 위해 발품 팔아 삼고초려 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인재를 찾는 기업들의 수요가 커지자 이들을 소개해주는 ‘프롬프트베이스’라는 플랫폼도 생겼다. 기업들은 이곳에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인재를 고용하고, AI와 대화하는 대본도 사고팔 수 있다.
국내에서도 AI 관련 직무 수요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국내 채용 플랫폼 원티드랩에 따르면, 기업들이 올린 개발 직군 채용 공고에서 AI 개발자를 원하는 기업은 지난해 10월 33.8%에서 지난 5월 39.9%로 증가했다. 그러나 구인 시장에 AI 인재가 없어 수많은 기업이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국내 AI 스타트업인 업스테이지는 4년째 ‘AI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상시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충당이 되지 않자, 해외에서 재택근무 조건으로 개발자를 채용해 버티는 상황이다.
일부 대기업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AI 전문가를 직접 찾는 실정이다. 현대자동차와 LG는 지난 6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AI 학회인 ‘국제 컴퓨터비전과 패턴인식 학술대회(CVPR 2023)’에 참석해 AI 전문가들을 찾아 나섰다. 국내 업계는 AI 인재 부족으로 타격을 입고 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의 ‘AI산업 실태 보고서’를 살펴보면, 1915개 설문 조사 기업 가운데 “AI 인력이 부족해 사업하기 어렵다”라고 답변한 기업은 3년 전 48.5%에서 지난해 81.7%로 늘어났다.
국내 대기업들은 AI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우물 파기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내년부터 성균관대학교에 채용 연계형 계약학과인 지능형소프트웨어학과를 만든다. 학사와 석사를 합쳐 5년 과정에 총 50명을 선발해 AI 특화 인재를 길러낸다는 계획이다. 재학 동안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고 삼성전자 인턴십, 삼성전자 해외 연구소 견학 등 혜택을 제공할 예정이다.
KT는 올해부터 카이스트와 포스텍에 ‘KT AI 융합 석사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LG는 지난해 연세대학교에 ‘지능융합협동과정’, 서강대학교에는 ‘인공지능’ 학과를 열었다. 네이버는 다음 달 서울대학교에 ‘멀티모달 딥러닝의 이론과 응용’이라는 과목을 만든다.
정부도 가세했다. 교육부는 올해 6월부터 첨단 분야 채용조건형 계약학과의 정원외 선발도 입학 정원의 20% 이내에서 50% 이내로 확대했다. 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프롬프트 엔지니어 육성을 위한 교육과정 신설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인공지능이 최상의 결과물을 내려면 AI 인재 육성이 꼭 필요하다”며 “교육과정을 대학 등 학교에 둘지와 교육 내용·기간, 민간 활용 연계 방식 등은 정책 연구를 통해 다듬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명오 기자 myung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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