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저마다 바쁜 세상…사람·사물·과거·욕망의 시선을 따라서
라이더 시점 추적 '관심연습'·폐기화폐 설치물 '네트워크' 등
디지털 세계 속 허구와 욕망, 삶의 속성 사유
도로 위를 달리는 화면, 시점을 통해 관람객은 이 시선의 주인이 배달 라이더임을 곧 알게 된다. 세 명의 라이더가 배달 한 건을 수행하는 동안 일어나는 움직임을 웨어러블 기기로 추적한 정아람 작가의 ‘관심 연습: 공동의 시선’(2022)은 라이더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초점 선에 맞춰진다. 이 얇고 희미한 선을 통해 관람객은 라이더 개인의 살아있는 신체활동을 인식함과 동시에 비가시화된 노동의 움직임을 추체험한다.
발전하는 기술에 힘입어 현대인의 생활은 나날이 편리해지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런 생활 전반에 스며든 디지털의 역할과 미디어의 영향력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더욱 확대됐다. 현대인은 이제 삶의 많은 부분을 비대면 시스템에 의지하며 생활한다. 비대면 문화 속 사회 연결망의 확대, 빠른 속도의 정보 공유,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기회 차단으로 인한 개인주의 심화는 우리에게 단절감, 심리적 불안, 그리고 만성적 외로움 등의 감정과 인식의 변화를 초래한다. 금호미술관은 이런 동시대적 흐름 속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대 문명의 징후에 주목한 여덟명의 작가가 선보이는 시각예술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감각과 정서를 탐구하는 기획전 ‘다중시선 A Glimpse of Our Time’을 10월 22일까지 개최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박혜수, 송승은, 양승원, 유용선, 이지연, 정고요나, 정아람, 함미나 등 국내 작가 8인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주변을 첨예하게 관찰하고 대도시 속 개인과 공동체 삶의 속성에 대해 고찰한 뒤 각자 고유한 시각적 언어로 관객에게 이를 제시한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쉼 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과열된 삶 속에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현재를 사는 관객에게 전시는 지금의 모습을 반추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현시대를 바라보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선사한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와 패턴을 차용, 다양한 식료품과 생활용품, 의류에 접목한 오브제를 경쾌한 화법으로 묘사한 유용선의 작업은 물질적 충만함 속에서도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길 원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소유할 수 없는 허무함을 시사한다. 고가의 시계, 옷, 자동차 등 사회적 권위와 부의 지표 등을 작가는 현재 소비문화가 유발하는 이질감이나 해소되지 않는 욕망처럼 요리 재료 다루듯 하나의 화면 안에 버무려 현대사회 속 개인의 복합적인 심리를 표현한다.
무수한 개인의 일상이 쉼 없이 공유되고 이를 관찰하는 소셜미디어 속 현상에 주목한 정고요나는 그 속에서 채집한 사진 속 사적 순간에 기반을 둔 회화 작업을 선보인다. ‘감정의 온도’(2023)나 ‘아름다운 9월’(2022) 등 그의 작업에서는 주로 자기 자신을 촬영한 ‘셀피’나 의도를 가리고 상황을 연출한 ‘간접셀피’가 연출되는데, 이 사진들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보다 타인에게 보였으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으며 사진을 통해 이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현대인의 패턴을 나타낸다.
흐릿한 경계, 형태와 연속성이 결여된 서사구조를 통해 우리 삶 속 여러 상황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정의 충돌과 일상에서 발생하는 불안,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송승은은 텔레비전, 테이블, 찻잔 등 평소에 쉽게 접하는 사물을 인물 형상과 함께 그려 넣어 느슨하고 과감한 묘사 속 윤곽이 모호한 형체를 통해 어슴푸레한 배경 공간 속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공개 모집, 설문을 통해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장기간 수집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을 이끌어온 박혜수는 2013년부터 ‘사랑과 실연’을 소재로 ‘굿바이 투 러브’(2013~2022)를 진행하며 전시와 프로그램을 통해 획일화된 사회 시스템 안에서 잊혀가는 개인의 삶의 영역과 가치를 다뤘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외부와 단절된 채 혼자 고립되어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에 주목해 현대인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실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규칙과 패턴을 드러내는데 주목한 이지연은 한국은행의 협조로 제공받은 폐기된 화폐 지설물을 활용한 설치 작업 ‘네트워크’(2018, 2023)를 통해 본래의 기능을 잃은 화폐의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선보인다. 자본과 자연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환원적 속성을 유기적으로 표현한 작품에서 작가는 정돈과 규율이 느껴지는 자본의 특징과 생명력을 변용 가능성으로 구현해낸다. 이는 오늘날 화폐의 물리적인 기능이 추상적인 가치로 전도되는 흐름 속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자본의 유동적이고 순환적인 가치를 제시한다.
함미나는 자신의 기억에 잔존하는 인물들을 작업에 투영한다. 유년시절에 일어난 험난한 사건, 유괴의 경험은 작업의 전제가 된다. 시간이 흘러도 강하게 남아 있는 작가의 어릴 적 기억들은 ‘잠영’(2023)에서와 같이 회색빛의 차가운 얼굴을 한 인물이나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잠재적 트라우마를 복기함과 동시에 감정의 내상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로 누구나 갖고 있을 마음의 상처를 함께 이겨내고자 하는 상호 간의 연대를 작품을 통해 제안한다.
실재와 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양승원은 직접 촬영하거나 조작한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인식을 비트는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는 작품에서 피사체의 사실적 기록이라는 사진의 고전적 기능에 대해 질문하는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발견되는 여러 허구적 특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3D 모델링 프로그램으로 구축한 가상의 공간에 흙, 시멘트와 같이 다양한 표면을 촬영한 사진을 덧붙여 조작한 ‘Overwrite’(2022) 연작 속 이미지는 돌산, 행성의 표면, 갯벌과 같이 우리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지리적 환경과 물질의 본질이 왜곡되고, 실재와 허구가 혼재하는 시대적 현상과 이를 의심하고 다시 생각할 지점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한다.
초연결 시대, 비대면 문화, 소셜미디어 확산, 심화한 개인주의 속 과열된 도시의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개인의 분주함을 촉구하고 있고, 이 전시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 동시대의 풍경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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