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19] 동료와 동포

전병선 2023. 8. 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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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민 초기, 영어도 기술도 서투른 패턴메이커로 일을 할 때였다. 지시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을 때 그 자리에서 모르는 단어를 물어서 사전을 찾으며 돌파해 나갔다. 당시, 내 테이블 오른쪽 모퉁이에는 성경과 나무 십자가, 영/한 사전과 영어/스패니시 사전이 비상 대기 중이었다. 그 회사는 프랑스계 유대인이 운영하는 회사로서 운영자 몇 명을 제외하면 남녀직원 대부분이 히스패닉계 직원들이었다.

해서, 남미계 직원들에게 스패니시도 열심히 배웠다. 그들 모두를 스승 삼아 열심히 배우려 하자 그들도 기뻐하며 가르쳐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Pattern Room에서 같이 일하는 마리아, 도라, 에스페란자와는 집에서 헤 온 음식을 서로 나눠 먹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김씨또, 김씨또”라고 불렀는데 그들 식으로는 내 이름 “Kim”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별하게 지냈다.

처음부터 패턴메이커는 아니었다. 애초에는 Production sample maker로 들어갔었다, 그 무렵 L.A.기술대학에서 Pattern Making을 공부하고 있었고, 마지막 학기의 Project로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다. 디자인이 내가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해서 사장 약혼녀의 크기로 패턴을 만들어 흰 Velvet 천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사장은 유럽으로 Design Collection Travel을 떠난 상태였고, 귀국하는 사장을 마중하러 나간 그녀가 그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고 한다. 당연히, 어떤 옷이냐고 사장이 물었고, 내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던 연고였다.

그 직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Dora라는 동료가 감기에 걸려서 그 동네 한국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간이식당에서 육개장을 사 왔다. 평소에는 토르티야로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이지만 몸이 아프니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나 보다. 아무리 간이식당이라고는 해도 한식은 비싸므로 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다 같이 둘러앉아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Dora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지? 하면서 그녀의 음식, 먹기 편하도록 널찍한 그릇에 쏟아부어 논 육개장을 보니, 꼭대기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Dora는 음식을 그대로 들고 나갔고, 얼마 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돌아왔다. 육개장 아줌마가 사과하기는커녕, “돈을 받아먹으려고 일부러 바퀴벌레를 집어넣었다”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었다.

Dora는 고발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당황한 내가 “미안하다. 돈은 내가 물어주겠으니 고발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리고 그 아줌마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아줌마는, 고발하지 못 하게 말려 달라고 말을 했다. LA에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비즈니스가 많다. 아마도 내가 Dora의 사장이라고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분은 그분대로 겪은 일들이 많으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화부터 냈는지는 모르겠으나, Dora는 나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보니, 그 아줌마의 가게로 보이는 곳에 천막이 덮여 있었다. 영업도 정지되었으니 벌금도 물었을 터. 핏줄이 무엇인지, 얼굴 한번 본 적은 없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 날부터, 나는 더 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사장이 들어 왔다가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 명씩 불러 내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고, 고발을 부추기던 Maria가 해도 되었다. 그것 역시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 일로 인하여 “동포와 동료”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 육개장 아줌마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슴 아픈 “내 동포”였다.

얼마 후에 나도 그 회사를 그만두고 더 큰 회사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신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아무리 아등바등 공부할 시간을 내려고 했지만, 하루에 24시간이 고작인 내가 일과 공부를 풀타임으로 함께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세요. 넉넉하게 감당하게 해 주세요. 제 상황을 다 아시잖아요?” 마침내 학기 말 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필요한 내용이 적혀 있는 노트페이지가 복사기에서 밀려 나오듯 눈앞으로 밀려 나오는 게 아닌가. 믿거나 말거나(believe or not),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다 두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행정 전도사인 나는 교회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하도 많아서 팔찌같이 팔에 걸고 있었는데….

교회의 구석구석을 점검하고 다녔다. 없었다. 혹시나 목사님 방에 넣고 그냥 닫고 나왔을까? 목사님이 교회에 안 계실 때, 가끔 목사님 방에 들어가서 음료수 냉장고를 점검하고 채우기도 했는데, 혹시. 그래서 희망을 품고 열쇠 기술자를 불러서 목사님 방문을 열어 보았으나 열쇠 뭉치는 거기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자, 어떻게 한다? 그 많은 방의 열쇠들을 다시 제작하고, 복사해서 관련자들에게 제공하려면 비용만 해도 무척 많을 테고. 그것도 당장 해야만 된다는 건데 시간은 벌써 오후였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냥 선 채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그 열쇠 뭉치가 어디 있을까요? 알려 주세요, 하나님!”

간단한 기도였고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그 열쇠 뭉치가 있는 곳이 눈앞에 훤~히 떠 올랐다. 나는 교회 부엌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 있는 Water Fountain(생수대)으로 달려갔다. 애타게 찾던 열쇠뭉치는 그곳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웬만하면 물을 잘 마시지 않는 내가 목이 너무 말라서 허겁지겁 물을 마시느라 열쇠 뭉치를 벗어 놓은 채 물을 마셨던 것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진작에 기도를 올려 드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을 다 한 나머지 불가능하게 되어서야 하나님께 아뢰었을까? 열쇠공을 부른 비용은 자비로 부담을 했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 6)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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